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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오징어 게임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이 ‘한미녀’인 이유

등록 2021-10-08 14:33수정 2021-10-19 18:13

내 이름은 김쿵쾅
현실 속 ‘안전 의탁’과 ‘생존’
오징어 게임 한미녀 역을 맡은 배우 김주령 인스타그램 갈무리
오징어 게임 한미녀 역을 맡은 배우 김주령 인스타그램 갈무리

지난 3월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 사건이 알려졌습니다. 면접 당사자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회적 약자가 변화를 일으키려고 하면 ‘예민한 사람’ 취급하는 게 기득권 입장에서는 가장 좋은 해결방법이잖아요. ‘예민하다’는 말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오히려 칭찬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예민한’ 그가 <한겨레> 온라인 칼럼으로 독자를 찾아갑니다. 20대 여성인 자신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독서 경험을 엮어낸 칼럼 ‘내 이름은 김쿵쾅’ 입니다.

※ ‘쿵쾅’은 단단하고 큰 물건이 서로 부딪칠 때 크게 나는 소리를 뜻합니다. 일부에선 성차별에 분노하고 성평등을 말하는 페미니스트를 가리켜 ‘쿵쾅이’라고 부릅니다. 페미니스트를 입막음하려는 이들이 ‘쿵쾅’의 의미를 변형·독점하려는 시도를 ‘김쿵쾅’이라는 필명을 통해 유쾌하게 맞받아주려 합니다.

요즘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굉장한 인기입니다. 전 세계 1위 콘텐츠라고 하지요. 저도 얼마 전부터 보고 있는데, 지극히 한국적인 게임과 인물 서사에 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데스게임(death game)이 곁들여지니 굉장히 신선하더군요. 인간의 본성, 돈의 가치, 평등 사회, 삶의 의미, 능력주의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생각할 거리가 많은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5화까지 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과 에피소드를 꼽으라면 인물은 ‘한미녀’를, 에피소드는 4화를 꼽을 것 같습니다.

4화에서 ‘한미녀’라는 여성은 깡패이자 게임 참가자 중 가장 신체적으로 우월한 장덕수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데, 이때 한미녀는 장덕수에게 “오빠, 오빠는 나 버리면 안 돼. 알지?” 하며, 장덕수에게 자신의 ‘안전’을 ‘의탁’합니다. 그러나 줄다리기 게임을 위해 10명씩 팀을 꾸릴 때 장덕수는 물리적 힘이 약하다고 판단되는 한미녀를 가차 없이 팀에서 추방해버리죠. 이때 한미녀는 자기도 팀에 끼워달라며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장덕수를 향해 애원합니다. 남성에게 자신의 ‘안전’을 부탁하는, 남성에게 자기의 신변의 안전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한미녀를 보며, 저는 최근 변화한 저의 ‘안전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준비하며 혼전 동거를 하고 있습니다. 서로 결혼에 대한 마음이 잘 맞았는데, 마침 남자친구가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제 자취방과 남자친구의 집은 차로 1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라 데이트를 하기가 쉽지 않았고, 남자친구는 늘 저의 ‘안전’을 걱정했습니다. 동네가 위험해 보이는데 쿵쾅씨 자취방이 있는 골목은 좁은 오르막길이라 더 위험해 보인다고, 가로등도 몇 개 없어 어둡다고, 옆집과 뒷집도 다 남자만 살지 않냐고,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와줄 사람도 하나 없어 보인다고 말이죠. 그러다 자연스럽게 동거 이야기가 나왔고, 어차피 결혼할 사이이니 제가 남자친구의 아파트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자친구와 동거를 시작한 후로부터 ‘안전’에 대한 저의 태도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얼마 전에는 집에 남자친구의 남동생이 오기로 했는데, 치킨이 먹고 싶다고 했나 봅니다. 그래서 집에 있던 제가 치킨을 배달시켰지요. 둘이 집에 도착하기 10분 전 주문한 치킨이 도착했고, 저는 “네, 나가요.” 하는 밝은 목소리로 답하며 문을 활짝 열고 음식을 받았습니다. 원룸 자취방에 혼자 살 때는 주문자가 ‘혼자 사는 여자’인 걸 들키기 싫어 배달 요청 사항에 ‘도착하면 문자 부탁드립니다. 전화 ×’라고 적어놓았던 저였는데, 어쩌다 요청 사항을 잘 보지 못한 배달기사가 문을 두드릴 때면 문고리 위에 있는 잠금 고리를 꼭꼭 걸고서는 좁은 틈으로 음식을 받던 저였는데 말입니다. 이는 ‘30평대 아파트에 젊은 여자가 혼자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편견과 10분 뒤면 두 명의 건장한 성인 남성이 도착한다는 것, 그리고 그동안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며 쌓인 ‘집안에 남자가 있다’라는 사실에서 오는 안전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남자친구와 동거를 시작한 뒤부터 택배가 오면 송장을 가루 수준으로 잘라서 버리던, 골목을 걸어가는데 뒤에 남자가 있으면 괜한 불안감에 종종걸음으로 계속 뒤를 돌아보던, 에어컨이 작동할 때 깜빡거리는 빨간 불빛을 보고는 너무 놀라 혹시 몰래카메라는 아닌지 에어컨 안을 살펴보던 저는 이제 없었습니다. 송장은 자르지도 않고 버리게 되었고, 저녁 약속을 나간 날이면 늘 차로 데리러 오는 남자친구 덕에 밤길 걱정 없이 늦게까지 친구와 수다를 즐길 수 있게 되었고, 혹시나 집안에 몰래카메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탐지기를 빌려 집안 곳곳을 쑤셔보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나 ‘평화롭다’는 것을, 남자들이 ‘한국만큼 치안 좋은 나라 없다’는 말을 하는 이유를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며 처음 알았습니다.

‘오징어 게임’ 속에서 한미녀를 생존을 위한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않고 오로지 장덕수에게 ‘몸을 파는’ 것으로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는 인물로 그린 점은 아쉽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한미녀의 마음이 배달 음식을 안전하게 받고 싶은, 밤길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싶은, 몰래카메라를 걱정하지 않고 싶은, ‘생존’하고 싶은 저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한미녀와 저의 차이라면 ‘안전 의탁’이 적극적이었느냐 우연이었느냐 정도겠지요.

우리는 ‘오징어 게임’ 속 세상처럼 법과 윤리가 파괴된 세상이 아닌, 본능을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세상, 법과 도덕이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오징어 게임’ 속 ‘안전 의탁’은 애초에 현실에서는 없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남성의 존재 없이도 여성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세상은 언제쯤 오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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