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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세상이 믿는 대로가 아닌, 나의 목소리로 기억되고 싶었다”

등록 2022-02-17 05:59수정 2022-04-06 11:02

[인터뷰]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 펴낸 김잔디
“원래 일터서 잘 살아내는 게 내게는 최선”
고통 함께 견뎌준 ‘어벤저스’들
피해호소인 동조 의원들 “의원직 사퇴 책임져야”
“서울시 매뉴얼, 위력에 대한 이해 없어”
지난해 3월17일 오전 서울 중구의 티마크그랜드호텔서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기자회견에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자리가 마련돼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 피해자가 참석해 사건과 관련해 발언했으나, 언론 노출은 동의하지 않았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3월17일 오전 서울 중구의 티마크그랜드호텔서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기자회견에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자리가 마련돼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 피해자가 참석해 사건과 관련해 발언했으나, 언론 노출은 동의하지 않았다. 사진공동취재단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폭력 공론화로 국내에서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운동이 본격화한 뒤 4년이 흘렀다. 그사이 유력 정치인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한국 사회에 경종을 수차례 울렸다. 그러나 피해자들에게 닥쳐온 것은 거대한 2차 가해였다. <한겨레>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이면서, 사건이 알려진 뒤 극심한 2차 피해를 입었던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고자 한다. 지난 1월 책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를 펴낸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김잔디씨를 만나 인터뷰했다. 이어 김잔디씨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위력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김지은씨와 “용기와 연대”를 나누어 온 일들을 전한다. 각 사건이 알려진 뒤 4년, 1년 반의 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김잔디·김지은씨와 같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사회엔 절실하다. 그들이 만든 틈이 뒤에 올 사람들에겐 숨을 이어갈 틈이 된다. 용기와 연대가 만든 균열이다.

①“세상이 믿는 대로가 아닌, 나의 목소리로 기억되고 싶었다”
② ‘용기와 연대’ 김잔디·김지은의 교류가 의미하는 것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김잔디(가명)씨가 지난달 20일 책을 펴냈다. 제목은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천년의상상). 김잔디씨는 책에 ‘피해호소인’이라는 빗나간 호명을 넘어 ‘피해자’라는 당연한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 분투했던 지난 1년 반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담았다.

지난 3일 서울 서초동 법무법인 온세상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한 김잔디씨는 어둡지 않았다. 애써 밝았다. 다만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갈 때마다 단어를 신중하게 골랐다. 집요한 2차 가해가 낸 생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김잔디씨는 여전히 피해를 의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는지 묻자 “진실의 영역과 믿음의 영역은 따로 있다”고 했다. “‘믿음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내가 괴로워하는 것이나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에너지를 쓰는 것이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들이 저를 아프게 한다면, 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제 권리를 보호하려고 노력할 거예요.”

박 전 시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에서 비롯된 애도의 물결은 거대한 2차 가해의 파도가 되어 김잔디씨를 덮쳤다. 정치권은 그 파도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더 높고 거친 2차 가해의 파도를 불러왔다. 여성운동가 출신 일부 정치인은 그를 ‘피해호소인’이라 부르자고 했다. 동시에 김잔디씨 곁에는 “여성운동이 10년을 후퇴해도 잔디씨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베테랑 여성운동가가, “죽고 싶다”는 절규를 함께 견뎌준 ‘어벤저스’들이 있었다. 박 전 시장 사건은 위력 성범죄를 다루는 한국 사회의 한계와 모순, 성취를 한순간에 드러낸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았다. 김잔디씨는 “이 사건을 통해 여성운동이 치열하게 싸우고, 그 성장통을 겪으며 자기 정화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수개월을 제주에서 보낸 김잔디씨는 지난해 서울시청에 복귀해 일하고 있다. 그사이 30년 써오던 이름을 바꾸고, 성형수술도 했다. “무서워서 숨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괴롭힐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도 얼굴과 실명을 밝히라는 2차 가해자들의 요구는 그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위력 성범죄 피해자들을 염려했다. “제가 선례가 돼 이후에 있을지도 모를 유사한 피해자들이 그런 요구와 야만적인 공격에 시달리는 것을 막고 싶어요.” 김잔디씨는 자신이 일상에 복귀해 오롯이 살아내는 게 다른 누군가에게 버팀목이 되길 바랐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게 연대의 뜻을 밝히며<한겨레> 젠더데스크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메시지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게 연대의 뜻을 밝히며<한겨레> 젠더데스크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메시지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피해호소인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책을 어떻게 내게 됐는지 궁금하다.

“사건 이후부터 일기로 썼던 것을 모으고 모았다. 지난해 4∼5월쯤 일상으로 복귀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 일을 내 목소리로 정리하고 싶다. 세상이 믿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내가 겪어낸 그대로, 나의 목소리로 기억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사건에 대한 의지와 결연함을 담아서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니다’라고 세상에 당당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복귀를 앞두고 느꼈던 두려운 감정들이 책에 자세히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도 복귀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피해자처럼 나에게도 원래 직장으로 돌아가는 건 무척 큰 결심이었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분이 이 조직의 수장이었고, 그분과 각별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여전히 서울시청 간부로 있다. 하지만 조직에서 일어난 일로 입은 상처에서 나를 회복시키는 책무 역시 이 조직에 있다고 봤다. 또 다른 조직에 가면 보호받거나 양해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이 더 제한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원래 소속된 조직에서 잘 살아내는 게 내게는 최선이었다.”

‘위력 성범죄’의 위력은 가해자의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박 전 시장의 과거 측근들과 지지자들은 ‘미투가 아니라는 증거’라며 업무상 쓴 손편지를 공개했고, 실명과 소속을 인터넷에 퍼 날랐다. 변호인의 과거 이력 등을 들어 ‘기획 미투’라고 주장하는 음모론까지 나왔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1월 “박 전 시장이 성희롱에 해당하는 성적 언동을 했다”고 결론 냈지만, 2차 가해는 그치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6개월 가까이 조사한 끝에 박 전 시장 행동을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여전히 피해를 의심하는 시선들이 있다.

“(피해에 대한 의심으로) 괴로워할 때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진실의 영역과 믿음의 영역은 따로 있는데, 믿음의 영역은 설득하기 쉽지 않다고. 어차피 제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도 설득당할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의 영역으로 인해서 제가 괴로워하는 것이나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제 에너지를 쓰는 것이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아프게 한다면, 그리고 그게 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면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내 권리를 보호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30년간 쓰던 이름을 바꾸고 성형수술도 했다. 책에는 “무서워서 숨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괴롭힐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 했다고 적어놓았다.

“사진과 이름의 최초 유포자는 비서실에서 같이 일했던 분들로 추측된다. 30년 동안 함께 했던 이름과 얼굴을 바꾸는 것은 힘겨운 결정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저를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줄인 것 같다. 내가 개명을 하고 성형을 한 뒤에도 이를 유포하는 것은 죄질이 천지 차이인 것으로 알고 있다. 보호막을 한 꺼풀 씌운 느낌이라서 괴로운 결정이지만 어느 면에서는 위안이 됐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의 피해자인 김지은씨처럼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라는 요구도 있다.

“김지은 선생님은 얼굴과 이름을 공개했는데도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들은 피해를 믿지 않는다. ‘믿음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 제가 이름과 얼굴을 공개했을 때 설득당할 가능성이 있다면 용기를 내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공격의 빌미를 주고 싶지 않다. 이후에 있을지도 모를 다른 유사한 피해자분께서 제가 선례가 돼 지금 같은 요구와 야만적인 공격에 시달릴 것을 막고 싶은 마음도 있다.”

“여성 운동이 10년을 후퇴해도 잔디씨가 중요하다”

박 전 시장 사건은 여성운동과 정치권력의 관계를 되묻는 사건이기도 하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김잔디씨가 박 전 시장을 ‘미투 사건’으로 고소할 예정이라는 사실은 ‘김영순 한국여성단체연합 당시 상임대표→남인순 의원→임순영 당시 서울시 젠더특보’를 거쳐 박 전 시장에게 전달됐다. 고소 사실이 유출된 2020년 7월8일 밤, 박 전 시장은 임 특보 등에게 “피해자와 4월 사건 이전에 문자를 주고받은 것이 있는데,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9일에는 임 특보에게 “아무래도 이 파고를 내가 넘기 힘들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박 전 시장의 휴대전화 신호는 이날 오후 3시39분께 끊겼다.

고소장을 접수한 서울지방경찰청은 당초 9일에 박 전 시장의 휴대전화를 확보하기 위해 압수수색 영장 신청 서류까지 작성한 상태였다. 경찰은 박 전 시장 사망 뒤 검찰에 보낸 송치 의견서에서 “피해자의 구체적이고 일관된 진술, 확보한 참고인의 진술, 목격자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 등 수사 결과로 보아 범죄혐의의 정황이 인정돼 피의자의 휴대전화 등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신청을 위한 서류를 작성했다. 그러나 피의자가 사망한 채로 발견되어 영장을 신청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고소 사실 유출은 수사기관에서 사건의 실체를 밝힐 기회를 영영 앗아갔고, 결과적으로 김잔디씨가 끝없는 2차 가해에 노출되는 ‘시작점’이 됐다.

―민주당 여성 의원 중 일부는 김잔디씨를 ‘피해호소인’이라고 부르자고 주장했고, 그들 중에는 여성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분에게 피해를 당하고, 페미니즘 운동을 하신 분들이 저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상황이 비이성적이고 현실감이 없었다. 저는 페미니즘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분들의 페미니즘은 그들의 진영, 주변에 일어난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사건을 통해 여성운동이 치열하게 싸우고, 그 성장통을 겪으며 자기 정화를 이뤄야 한다. 이 사건이 어떻게 보면 (여성운동이)좀더 건강하고 바른 방향으로 나가기 위한 모멘텀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난해 3월17일 오전 서울 중구의 티마크그랜드호텔서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 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3월17일 오전 서울 중구의 티마크그랜드호텔서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 사진공동취재단

―책에서 2차 가해가 극심한 가운데 김잔디씨를 도왔던 이들을 ‘어벤저스’라고 불렀다.

“어벤저스라고 부르는 분들은 김재련 변호사님, 이미경 전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님, 고미경 전 한국여성의전화 대표님 등 8명이다. 이분들에게 얻은 가장 큰 도움은 내가 죽고 싶을 때 ‘죽고 싶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재작년 7월10일부터 모든 순간, 심지어 이 순간까지도 죽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정말 위태로운 순간마다 함께 있어 주셨다. 죽을 마음을 먹은 사람한테는 ‘죽고 싶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상대의 존재가 굉장히 중요하다.”

―김잔디씨를 조력했던 ‘어벤저스’ 가운데에서도 여성운동을 오래 해오던 분들이 있다. 이미경 당시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괴로워하는 김잔디씨에게 “여성운동이 10년을 후퇴한다고 해도 잔디씨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책에 적었다.

“‘죽고 싶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잔인한 특성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누군가 생명을 잃어야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적극성을 보여주는 사회, ‘피해자의 죽음’을 반성과 성찰의 계기로 삼는 사회의 잔인함 말이다. 사실 ‘죽고 싶다’ 마음 먹을 때 이 사건의 심각성, 특히 위력 성폭력 사건의 심각성이나 2차 가해의 잔인함에 대한 성찰과 제도적 보완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고민을 되뇔 때 이미경 소장님이 그런 말씀을 해주셨다. 그 말의 취지는 내가 죽으면 10년이 후퇴하지만, 내가 살면 후퇴하지 않거나 오히려 10년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죽어야만 사회가 반성한다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고, 10년 그 이상의 후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에 ‘피해호소인’ 주장에 동조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이재명 대선후보 선대위에 있다. 추후에 어떤 조처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책임 있는 사람은 당연히 의원직을 사퇴하는 정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대통령이 되길 바라는 분이라면 자기편이라고 감쌌던 것이 본래 사건만큼이나 잘못된 처사였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고, 박 전 시장의 일부 추종자들이 2차 가해를 벌일 때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우리 당이 추구하는 바와 다르다’라고 명확히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정말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의 확실한 사과나 후속 조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사과의 진정성을 믿지 못하게 되고, 피해에 대한 위로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끼게 된다. 말뿐인 사과, 선거 전략상 사과는 우리 사회를 후퇴시키는 모습이라고 본다.”

“하급자의 사적노무 거부 명시한 매뉴얼은 또다른 2차 가해”

‘사적 노무’는 ‘2차 가해’와 더불어 박원순 전 시장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이라는 두 위력 성범죄를 아우르는 열쇳말이다. 유력 정치인을 지근거리에서 수행하는 여성 직원은 두 권력자의 ‘심기와 기분’으로 자신의 성과를 평가받아야 했다. 4년간 서울시장 비서로 근무한 김잔디씨는 박 전 시장의 약을 대리 처방받고, 샤워 전·후 속옷을 관리하고, 혈압을 재고, 명절 장보기까지 해야 했다. 김잔디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돌봄·감정노동’이 박 전 시장이 ‘선’을 넘는 행동을 하는데 주춧돌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지난해 4월 인권위의 권고를 받아들여 사적 연락, 옷매무새 다듬어주기 등을 금지한 비서 업무 매뉴얼을 마련했지만, 김잔디씨는 “위력에 대한 이해가 없는 매뉴얼”이라고 했다. 매뉴얼이 상급자가 아닌 하급자인 비서의 특정 행동을 ‘금지’하는 방식으로 짜였기 때문이다.

―박 전 시장의 약을 대리 처방받고, 도시락과 과일, 명절 음식까지 챙겼다. 이런 ‘사적 노무’가 박 전 시장이 어느 순간 ‘선’을 넘는 행동을 한 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나?

“그렇다. 가령 나는 그분이 약을 제때 드시게끔 하는 노동까지 해야 했다. 약 먹는 걸 싫어하시는 사람에게 약을 먹이는 걸 과업으로 하다 보니, 그분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도 업무가 되었다. 업무니까 살갑게 굴면서 약을 드시도록 부탁을 하고, 약을 먹으면 감사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약을 먹으면 무슨 소원을 들어줄 거냐’는 식의 말이 나오고, 그게 선을 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이 사람이 좋아서 하는 행위가 아니라 업무에서 파생되는 일인데, 그 사람이 느끼기에는 ‘얘가 나를 좋아해서 이렇게 한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인권위 권고 후 서울시에서 2차 가해 예방 교육을 실시하기로 하고 비서 업무 매뉴얼도 새로 마련했다.

“새롭게 마련된 비서 매뉴얼 내용은 좀 황당했다. 서울시 비서 매뉴얼에 ‘비서가 사적인 노무를 거부할 수 있다’는 취지의 조항이 추가됐다. 더 주체성이 강한 사람에게 ‘사적 노무를 시키지 말라’는 의무를 부여해야 맞지, 주체성이 비교적 떨어질 수밖에 없는 비서에게 ‘사적 노무를 거부하라’고 하는 매뉴얼은 위력에 대한 이해가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 매뉴얼 자체가 내가 거부하지 않아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 같은 자책을 하게 하는 매뉴얼이었고, 또 다른 2차 가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지은씨가 선물한 책에 적힌 “용기와 연대”

―박원순 전 시장 사건처럼 위력 성폭력 피해로 고통받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내가 신호등을 못 봐서 사고를 당했다’거나 ‘내가 까만 옷을 입어서 사고를 당했다’라고 일일이 해명하고 다니지는 않지 않나? 그런데 성폭력 사건에 연루되면 이상하게 피해자가 설명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그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게 자기 자신이다. ‘내가 왜 그때 그런 행동을 했지’ ‘왜 그때 상대방에게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지’하는 늪에 빠지다 보면 일이 더 어려워지고 자존감도 많이 떨어져서 돌이키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 자신을 사랑하고, 어떤 결단을 내렸으면 그 결정을 믿고 나아가는 게 본인의 회복, 극복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김잔디씨는 인터뷰 자리에 자신의 책을 들고 오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안희정 전 지사 사건의 피해자인 김지은씨가 펴낸 <김지은입니다>가 들려있었다. 박 전 시장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2차 가해가 극에 달했던 2020년 7월 김지은씨가 직접 선물한 책이었다. 책 첫 페이지에는 김지은씨가 직접 적은 “용기와 연대, 힘내세요”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김잔디씨도 자신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의 오늘이 나의 내일에게, 그리고 누군가의 오늘과 내일에게 용기를 주는 삶이 되기를 소망하며 이 이야기를 펴낸다.” “용기와 연대”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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