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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여성발전기본법(현재의 양성평등기본법)에서 ‘직장 내 성희롱’이라는 법적 개념이 처음 정립된 뒤 27년이 지났다. 예방교육 의무화, 사업주의 처벌 규정 도입 등이 이어졌으나 일터의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조차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를 위한 안전망과 보호조치를 제때 제대로 가동하지 않고 있다. 피해자들은 신고 뒤 사건 무마 시도나 2차 피해에 맞닥뜨린다. 가해자 대신 자신이 일터와 업무에서 배제될까 두려움을 안은 채 신고를 한다. 개별 사건마다 특수성이 있지만, 피해자의 이런 우려는 공통이다. <한겨레>는 공공기관, 대기업에서 일어난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을 조명하고, 사건 처리 과정서 반복되고 있는 2차 피해 등의 실태를 3회에 걸쳐 짚어본다.
① 한국건강가정진흥원, 성희롱 사건 2차 피해 의혹
②“상사도, 인사팀도, 고용노동부도 믿지 마세요”
③ 왜 가해자 아닌 피해자가 내몰려야 하나요?
20대 여성 이아무개씨는 호텔신라 입사 2년 차인 지난 2016년 같은 팀 상사 ㄱ씨로부터 세 차례 강제추행을 당했다.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으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사무실 자리와 직무를 바꿔준 게 회사가 취한 ‘분리조치’였다. 2019년 가해자가 정직 1개월 처분을 받은 뒤에도 회사는 피·가해자를 같은 부서에 배치했고, 피해자인 이씨가 부서를 옮기도록 회유했다. 원치 않는 부서 이동을 당하면서 이씨는 갖은 소문과 2차 가해에 시달려야 했다. #사례 ②
한국건강가정진흥원(한가원)의 ㄱ부서에서 일하던 20∼30대 여성 직원들은 지난해 10월 40대 남성 동료 직원 ㄴ씨로부터 “모 연예인이 ‘밤일’ 잘하는 남자를 좋아한다더라” 등 성적 불쾌감을 일으키는 말을 들었다. 이후 여성 직원 ㄷ씨 등은 회사에 이 사실을 알리고 ㄴ씨와의 분리조치를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가 분리조치한 건 가해자로 지목된 ㄴ씨가 아닌 피해자 가운데 실명으로 신고한 ㄷ씨였다. 이 때문에 다른 피해자들은 사건 발생 3개월이 지나도록 ㄴ씨와 같은 공간에서 일해야 했다. 피해자 의사에 반한 부서 이동 신고했으나 묵인 당한다. 분리조치를 요구하면 ‘피해자’가 이동한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다수가 피해 사실을 회사에 알린 뒤 공통으로 겪는 일이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은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시 사업주가 △지체 없이 조사하고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불리한 조치(직무 재배치 등)를 해서는 안 된다고 정하고 있다. 이런 규정은 현실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직장갑질119가 2017년 11월부터 2021년 1월까지 직장 내 성희롱에 관한 신고 364건을 분석한 결과, 직장 내 성희롱을 신고했다는 비율은 37.4%에 불과했다. 신고해봤자 묵인·은폐될 가능성이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실제로 같은 조사에서 신고한 사람들 가운데 묵인·방치 등 사업주가 조치 의무를 하지 않았다는 답변 비율은 41.5%나 됐다. 신고자 2명 중 한 명은 사업주의 적법한 조치를 받지 못한 셈이다.(2021년 2월 발표, 직장인 성희롱·괴롭힘 실태 보고서) 남녀고용평등법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부서이동 등을 ‘불리한 처우’로 보고 3년 이하 징역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 그런데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분리’는 흔하다. 김하나 직잡갑질119 변호사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피해자는 성희롱에 더해 직무변경으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감내해야 하고, (이동한 부서에서) 2차 피해를 추가로 겪게 될 수 있다”며 “‘피해자 분리’는 피해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조치가 될 수 있는 만큼 피해자가 원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제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실제 호텔신라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이씨도 “인사철이 아닌데 갑자기 (피해자가) 이동하니 다들 ‘왜 옮겼냐’고 묻고, 여러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고 토로했다. 회사의 부서이동 지시를 마냥 거부할 수 있는 직원은 흔치 않다. 결국 받아들이면 사업주가 빠져나갈 빌미가 된다. 이씨도 “왜 피해자가 옮겨야 하느냐, 싫다”는 의사를 명확히 밝힌 후 부서이동을 수용했는데, 이를 두고 고용노동부는 사업주의 ‘강요로 보기는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가해자 징계 결과 피해자에 공개 안 해 징계위원회가 열려 가해자에 대한 징계가 확정된 뒤에도 피해자가 그 결과를 볼 수 없는 경우도 다반사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사업주는 징계 등의 조치를 하기 전에 이에 대해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조치 ‘전’ 의무만 있을 뿐, 결과 통보에 대한 의무 규정은 없다. 최수영 서울여성노동자회 고용평등상담실장은 “징계위 결과를 피해자에게도 공개하지 않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신고자가 사건 처리 결과를 아는 건 너무 당연한 권리인데, 기본 권리조차 고려되지 않은 것”이라며 “가해자와 달리 피해자에게는 재심 청구권, 절차에 대한 이의신청 권한도 없는 등 징계 과정 전반에서 피해자가 소외되고 있다”고 했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펴낸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 사건 처리 매뉴얼’에는 ‘고충처리결과를 피해자 및 행위자에 서면으로 통보한다’는 규정이 있다. 통보 의무 규정의 공백은 피해자를 이중의 손해 속으로 몰아넣는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의 72%는 퇴사하는데(2016·서울여성노동자회), 이후 실업급여를 신청하면 성희롱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고충처리조사결과나 징계처리결과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업주의 발급 의무가 없는 문서를 고용노동부가 요구하는 셈이다. 피해자 보호 실효성 떨어지는 성폭력방지법 국가기관이 앞장서 직장 내 성폭력 재발 방지와 피해자 보호 의무 강화에 모범을 보이겠다며 만든 법은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된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성폭력방지법) 개정안 제5조의4는 “공공기관 장은 해당 기관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사실을 알게 된 경우 피해자의 명시적인 반대의견이 없으면 지체 없이 그 사실을 여성가족부 장관에게 통보하고, 해당 사실을 안 날부터 3개월 이내에 재발방지대책을 제출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여가부 산하 기관 한가원은 지난해 11월 사내 성희롱 사건을 인지하고도 조사가 끝날 무렵인 1월25일에야 여가부에 통보했다. 지난해 10월 말 사건이 발생한 뒤 피해자 ㄷ씨는 11월11일에는 공공기관 장인 이사장과 면담했다. 공공기관 장은 사건 인지 이후 ‘지체 없이’ 이 사실을 여가부에 통보할 의무가 있지만, 사건 면담과 조사가 이뤄지는 동안 통보하지 않았다. 조사가 길어지면서 ‘해당 사실을 안 날부터 3개월 이내에 재발방지대책을 제출해야 한다’는 조항도 지켜지지 않았다. 법은 사건 발생시 여가부 통보를 의무화하고는 있지만, 이를 어겼을 때의 조치 방안은 정하지 않고 있다. 법 조항에서 명시한 ‘지체 없이’ 통보하라는 기준도 모호하다. 실무 주체인 여가부조차 뚜렷한 기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여가부 관계자는 <한겨레>에 “법령에서 말하는 ‘지체 없이’란 ‘사정이 허락하는 한’으로 해석하면 된다”며 “큰 틀에선 가능한 한 빨리 통보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내부 사정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고 했다. 여가부의 설명대로 ‘사정이 허락하는 한’ 통보하도록 한다면 통보 시기는 사실상 공공기관 장의 재량과 의지에 달린 셈이다. 박고은 최윤아 기자 euni@hani.co.kr
연재멈춰, 직장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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