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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정신을 잃어서, CCTV가 없어서…‘약물 성폭행’은 처벌 예외?

등록 2023-05-10 18:08수정 2023-05-10 19:06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ㄱ씨는 친구 ㄴ씨를 오랜만에 만나 술집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 소주 1병을 나눠 마신 뒤 화장실에 다녀온 ㄱ씨는 ㄴ씨가 추가 주문한 술을 마시고는 기억이 끊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 ㄱ씨는 혼자 길에 쓰러져 있었다. 성관계하는 장면이 스치듯 떠올랐다. 평소 독주도 거뜬히 마셨던 ㄱ씨는 술에 약물이 섞였다고 의심하고, ㄴ씨를 준강간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동의한 성관계’였다는 ㄴ씨의 주장을 받아들여 ㄴ씨를 불기소 처분했다.

ㄷ씨는 채팅으로 만난 ㄹ씨와 술을 마신 뒤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옷을 입지 않은 상태로 모텔에 누워 있었다. ㄷ씨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모텔에 오게 됐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모텔엔 폐회로텔레비전(CCTV)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 ㄷ씨는 ㄹ씨를 준강간 혐의로 고소했으나 사건은 불기소 처분으로 종결됐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은 10일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피해와 지원 방안 모색’ 여성인권포럼에서 ‘약물 이용 성폭력’ 피해자를 상담·지원한 사례(피해자가 드러나지 않게 각색)를 공개했다.

‘약물 이용 성폭력’이란 약물을 탄 음료수나 술 등을 피해자에게 먹여 의식을 잃게 만든 뒤 저지르는 성폭력을 말한다. 피해 지원 사례를 공개한 김태옥 천주교성폭력상담소장은 법률상의 한계 탓에 피해자가 약물 이용 성폭력 피해를 호소해도 보호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시시티브이 보관 기간이 업소마다 달라 (사건 발생일로부터) 시간이 지났을 경우 증거 확보가 어렵다”며 “증거가 확보돼도 수사·사법기관이 (혐의를 부인하는) 가해자 진술에 의존해 사실관계를 확정하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 호소는 외면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예가 동의도, 항거로 할 수 없었던 상태의 여성 피해자를 모텔로 끌고 가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혐의로 기소된 남성 피고인에게 무죄를 확정한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이다. 법원은 피고인이 피해자의 옷을 벗긴 것은 인정하면서도, 피해자의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간음하려는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10일 서울 중구 이엔에이(ENA) 스위트 호텔에서 한국 여성인권진흥원이 주최로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피해와 지원 방안 모색’ 포럼이 열리고 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10일 서울 중구 이엔에이(ENA) 스위트 호텔에서 한국 여성인권진흥원이 주최로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피해와 지원 방안 모색’ 포럼이 열리고 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심지어 피해자에게서 약물이 검출되더라도 현행 법률로는 가해자를 처벌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 소장은 “준강간죄는 피해자가 음주로 인해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는지 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피해자의 상태를 이용해 간음했는지도 함께 충족돼야 한다”며 “범죄 입증 과정이 매우 험난하다”고 말했다. 실제 준강간 혐의로 고소된 ㄹ씨가 불기소 처분을 받은 이유는 ㄷ씨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이 인정되지 않아서다. ㄷ씨가 사건 당시의 기억이 조금씩 난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ㄹ씨가 폭행이나 협박으로 ㄷ씨를 강간했는지도 알 수 없어 강간죄도 적용할 수 없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었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이뤄진 성관계를 성폭력 범죄로 처벌하는 ‘비동의 강간죄’ 조항 신설 필요성이 다시 한번 제기됐다. 2003년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한 영국은 강간 사건에서 상대방이 동의 능력이 있었는지, 동의할 자유가 있었는지, 가해자가 상대방의 동의 여부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등을 강간죄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다. 장다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유효한 동의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성적 행위로 나가는 행위를 처벌 범위로 포섭하고, 약물 이용 시 더 중한 범죄 행위로 구성요건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법이 개정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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