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 여성살이
갱년기, 하고 싶은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나이다. 몇 년 전 배우다 만 라틴댄스에 최근 다시 도전했다. 이번엔 친구 다섯과 함께다. 문제는 시원찮은 무릎 관절. 동네산을 오르내리기에도 삐걱거리는 처지에 격렬한 몸동작을 소화해 낼 수 있을까? 차라리 전통춤을 배우라는 권유도 있었다. 무릎에 과부하가 없고 부드러운 동작이라서 갱년기에 최적이라나. 그러나 우린 모두 무리하기로 했다.
첫날 저녁 트레이닝복을 입고 서니 갑자기 내 몸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연습실 큰 거울에 드러난다. 푹 퍼진 골반과 내려 앉은 엉덩이, 털럭대는 팔다리의 살. 엉덩이를 돌리려 하니 실룩대기만 할 뿐, 차차차의 기본 스텝 하나 익히는 데도 쩔쩔 맨다. 땀만 쏟아내며 첫날 강의가 끝났다. 다음 날 아침, 예상대로 무릎은 쑤시고 발목까지 욱씬거린다. 우울해진다. 친구 하나는 벌써 포기하고 강의료를 환불받았다. 남의 시선 속에서 몸을 움직여 춤추는 게 쑥스럽고 어색한 거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걸. 어디 한번 제대로 망가져 보자. 좀더 과감하게 몸을 던진다. 마구 팔을 휘저어 ‘뉴욕’ 스텝을 시도하고, 한 박자씩 늦으면서도 터닝을 시도하다 강사의 지적을 받는다. 창피하다. 그래도 즐거우니 이를 어째?
비록 스텝은 꼬이지만 그래서 우린 웃으며 춤춘다. 춤추며 만나는 땀내나는 자유. 남에게 보여지는 착한 내 모습을 위해 끙끙대며 50년을 살았다. 이젠 내 멋대로 50년을 살겠다. 우리 모두에게 춤은 일종의 선언인 셈이다. 사춘기처럼 다시 뭔가에 미치고 싶은 나이에 접어들었음을 즐겁게 인정하자. 내 자신을 엔터테인하는 능력이 갱년기의 천적 우울증의 특효약인 걸. 즐거움은 밖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스스로 자가발전기를 돌려 즐거움을 생산해 내야 한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저지른 것이다.
댄스 슈즈도 굽 낮은 걸로 하나씩 맞췄다. 기분이 근사하다. 우리 반 30명의 클래스 메이트들 중엔 ‘쉘위 댄스’풍의 넥타이 직장인들도 예닐곱 명 있다. 30대 부터 50대까지 하나같이 진지하다. 내 나이 또래 여성들 중 장바구니 들고 어두컴컴한 비밀무도장에서 춤춘다는 게 너무 싫어 춤 배울 엄두를 못냈던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밝은 조명과 환기 잘 되는 거울 연습실로 나온 춤이 그래서 더욱 반갑다.
동료 몇이 자기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 라틴댄스를 출 거라며 우리에게도 같이 출연해 달라나. 이런. 벌써 섭외까지? 근데 뭘 입고 무대에 서지? 실력은 안되면서 무대 의상 걱정을 하는 내 자신이 우스워 죽겠다. 라틴댄스 클럽은 홍대 앞에 많지만 ‘수질’ 관리상 중년은 연령 제한에 걸린다나. 무공을 연마한 뒤 강호로 나가야하는 건 정해진 이치. 딸이 이태원의 클럽 몇 군데를 알아보겠다고 응원하는 효심을 보인다. 흐뭇! 우린 끝까지 가볼 생각이다. 무릎연골 강화제를 먹어가면서라도 말이다. 차차차 다음엔 자이브 댄스도 춰보고 싶다. 이러다 우리 모두 춤바람의 전설로 등극하지 않을까? 다시 태어나면 나는 플라멩고 댄서가 되고야 말테다.
박어진/ 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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