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심리학적 가치는 재미와 의미다. 의미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추얼’을 통해서다. 사소하고 단조로운 반복으로 보이지만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로 확인되는 것이다. 그 삶의 사소함에서만큼은 내가 삶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언론인 메이슨 커리의 책 <리추얼> 추천사에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이렇게 썼다. 리추얼은 의식적으로 반복하는 행동이다. 순식간에 흘러가버리는 일상 한 자락을 온전히 자신에게 보내는 시간이다. 거창할 필요 없다. 이불 개기, 아침밥 먹기도 리추얼이 될 수 있다. 코로나로 일상의 리듬이 깨지기 쉬웠던 지난 한 해는 어쩌면 그 위로가 가장 필요했던 때였을 테다.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계획하는 연말은 ‘리추얼’의 시기다. 에세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쓴 김하나씨는 연말에 새 수건 세트를 산다. 새해 첫날 개시할 수건들이다. “색깔과 크기가 통일된, 보드라운 수건 열두장이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쓸 때마다 나를 보살피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선반을 열 때마다 반듯한 생활이 시각적으로 증명된다.” 매년 쌓이는 리추얼은 자기만의 역사가 된다. 자기만의 연말 리추얼을 꾸린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매년 가족 상장 수여식을 여는 신순화씨 가족. 신순화 제공
매년 가족 상장 수여식을 여는 신순화씨 가족. 신순화 제공
책 <해리 포터를 읽는 시간> 등을 쓴 신순화(50)씨는 매년 12월31일에 상장 5개를 주고받는다. 남편과 세 아이, 그리고 자기 자신이 주는 상이다. 올해로 7년째다. “그림책 작가 타샤 튜더는 아이들 생일 때 촛불을 밝힌 케이크를 작은 나무 뗏목에 실어 시냇물에 떠내려 보냈다고 해요. 아래쪽에서 기다리던 아이들은 시냇물을 타고 오는 케이크를 보며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저도 우리 가족만의 추억거리를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상장을 주려면 1년 동안 칭찬할 거리를 돌아봐야 한다. “아이들 키가 자란 것도 칭찬할 거리가 되더라고요.” 그 칭찬은 사람을 울리기도 한다. 이런 의식을 쑥스러워하던 남편이 멋들어진 펜글씨로 쓴 ‘나의 사랑, 나의 평온’ 상을 주자 순화씨는 울었다.
처음 상장 수여식을 할 때, 6살 막내는 글씨가 서툴러 그림을 그렸다. 그 막내가 11살이 된 지난해엔 자신에게 ‘도전정신 좋았상’을 줬다. 전교 부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떨어졌지만 괜찮다고 자기를 토닥일 만큼 자랐다. 막내는 공약 아이디어 등을 도와준 엄마에게 ‘도움의 여신상’을 수여했다. 6년간 모인 상장엔 아이들의 성장뿐 아니라 개성도 담겼다. 19살이 된 첫째는 치아 교정을 시작한 동생에게 철조망을 그린 ‘분단의 아픔상’을 줬다. “위 사람은 힘든 암흑의 시기에 들어섰습니다. 사랑과 관심으로 지켜봐주길 바랍니다.” 15살 둘째 딸은 지난해 자신에게 ‘그래도 상’을 안겼다. 상장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코로나가 심했지만 그래도 학교에 갔고 친구들을 사귀었고 공부도 조금 했네.”
“연말이면 기대가 돼요. 올해는 어떤 상장을 줄지, 받을지. 코로나 시기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부단히 의미를 찾아야 견딜 수 있는 때 같아요.” 순화씨 가족은 집 거실에서 상장 수여식을 하고 매년 같은 소파에 앉아 사진을 찍는다. 아이들이 자라며 소파가 점점 좁아졌다. 서로의 의미를 새기던 순간들이 쌓였다.
동창들과 독서모임을 꾸려 연말 시상식을 여는 김주미씨(맨 오른쪽)와 회원들.(한주원, 권두향, 최영진, 한효진. 왼쪽부터)
‘아, 상 받고 싶다.’ 김주미(29)씨는 생각했다. “아이들은 별거 아닌 거로도 상 받잖아요. 부럽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끼리 주기로 했어요.” 올봄 십년지기 네 명과 ‘우리’라는 독서모임을 꾸렸다. 대학 동창들인데 지금은 부산, 김천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코로나로 자주 볼 수 없으니 줌(화상회의 플랫폼)으로라도 만나고 싶었어요. 같은 취미를 공유하고요.” 2주에 한 번씩 한 명씩 돌아가며 책을 추천하고 질문 세 개를 마련했다. 다섯은 지난 6일 만나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책을 추천한 사람, 좋은 질문을 해준 사람을 투표로 뽑고 상을 줬다. 학교 상장처럼 금박을 입힌 종이에 주미씨가 인쇄해 갔다. 1년간 읽은 책에서 따와 라다크상, 모모상, 재테크상, 철학가상, 군주상도 만들었다. 상을 남발하는 거 아닌가? 거저 주지 않는다. 자기가 왜 이 상을 받아야 하는지 설득해야 한다. “제가 라다크상을 획득했어요! <오래된 미래 라다크> 책을 읽으며 공동체의 소중함을 느꼈는데, 제가 이 독서모임을 하자고 했으니까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죠.”
김주미씨는 화상회의 시스템을 통해 독서 모임을 갖는다. 김주미 제공
이 독서모임에서 <고슴도치의 소원>이란 책을 같이 읽었을 때 주미씨는 울었다. 친구를 초대하고 싶은데, 친구를 만족시켜주지 못할까봐 고슴도치는 고민만 한다. 집이 터질 정도로 케이크를 구워도 부족한 거 같다. 주미씨는 고슴도치가 자기 같았다고 했다. “고슴도치가 답답하다, 이해가 안 된다”는 친구들도 있었다. 다섯은 오래 이야기했다. “10년을 사귀어 서로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정말 다른 사람들이었어요. 그 차이를 인정하니 서로 더 존중하게 됐어요. 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모임을 하면 다음날 살아갈 힘이 생겨요.”
‘시상식’을 한 지난 6일 다섯은 오랜만에 함께 바닷바람을 맞았다. 10년 전엔 모두 학생이었지만 이제 경찰, 관세공무원, 무역회사 직원, 편의점 지점 관리 등 하는 일이 다 다르다. 이들은 독서모임과 ‘시상식’을 쭉 이어갈 계획이다. “적금 쌓듯 매년 쌓아갈 거예요. 그러면 나이 들어 가는 게 안 무서울 거 같아요.” 결혼했다고 독서모임을 빠지는 자에게는 무시무시한 벌금을 때리기로 했다.
<한겨레S>에 암 극복기 ‘
양선아의 암&앎’(
https://www.hani.co.kr/arti/SERIES/1650)을 연재 중인 <한겨레> 기자 양선아(44)씨의 책꽂이엔 2013년부터 쓴 다이어리가 꽂혀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써왔고 남아 있는 게 그 정도다. 그대로 ‘양선아 실록’이다. 올해엔 자신만의 스타일로 다이어리를 만드는 ‘불렛 저널’을 썼다. 자기만의 인덱스가 포인트다. 양씨는 일기, 가계부, 스케줄 노트를 한 권에 몰아넣고 자신만의 특별한 챕터도 만들었다.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챕터를 펼치면 그가 행복했던 순간들이 나온다. 올해 봄 안양천에서 그는 숭어를 봤다. 어느 날 오후, 라디오 음악을 듣다 그 순간이 좋아 기록을 남겼다. 필라테스 하다 하체의 힘을 느낀 날도 거기 있다. ‘걷는 사람 양선아’ 챕터엔 어디를 얼마나 걸었는지 날짜별로 적혀 있다. 기자인 그는 유방암 치료 뒤 회복 중이다. “힘들 때 보면 행복한 순간들의 기록이 해법이 돼요.” 가족을 바라보고 기록한 챕터도 있다.
연말에 그는 이 기록을 다시 한 번 훑어본다. 상반기, 하반기 그만의 ‘올해의 뉴스’를 꼽고 내년의 소소한 목표들을 세운다. 지난해엔 수술 회복 잘하기, 커피는 하루에 한잔, 여행하기 등 목표를 세웠다. “웬만큼 다 했네요. 한 해 기록을 보다 보면 내가 나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는 느낌이 들어요. 죽을 때까지 나 자신을 잘 알고 갈 수 있을까 생각하곤 하는데, 메모들을 보면 내가 어떨 때 행복하고 짜증 나는지 더 잘 알게 되지요. 가족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그 순간순간 잘 살았구나 성취감도 들고 자존감이 올라가요. 인생이 자신을 알아가는 항해라면, 이런 리추얼이 순항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등대 같아요.”
김소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