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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언마다 “다 해봤다” 시큰둥한 남편,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ESC]

등록 2023-06-11 11:00수정 2023-06-11 23:26

곽정은의 단호한 관계 클리닉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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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제 남편은 발표할 때, 또는 상사 앞이나 어려운 식사 자리에서 손과 말을 떨어요. 긴장되는 상황이 되면 심장부터 벌렁거린대요. 어릴 적 부모님한테 학대를 받은 경험이 있어 많이 안쓰러워요. 상담도 받아보고, 약도 먹었는데 고쳐지지 않아 많이 힘들어합니다. 이런 주제로 대화할 땐 최대한 고통을 이해해주면서 나름대로 방법을 추천하는데요. 남편의 반응은 계속 “다 해본 거야”라는 식이에요. 또 제가 “당신은 언젠가는 더 나아질 거라고 믿어”라고 하니 “그런 뻔한 얘기는 도움이 안 되겠는데”라고 반응하더라고요. 저는 남편과 어떻게 대화하면 좋을까요? 남편의 공포증이 안타까운 부인.

A. 사연자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로 압축됩니다. 최대한 고통을 이해해주면서 나름대로 방법을 추천했다는 사연자로서는 옆에 있는 사람 입장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냥 공감만 해준 것도, 방법만 제시한 것도 아니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신 것이지요. 하지만 저쪽의 반응은 별로 탐탁지가 않아 보입니다. ‘다 해본 거야’라는 말도, ‘그건 뻔한 이야기고 도움이 안 되겠다’는 말도,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한 가지이죠. 별로 듣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남편은 아마도 꽤 오랫동안 ‘발표불안’을 겪으신 것으로 보이고, 나름대로 여러 방법을 다 해 보았지만 원하는 만큼의 변화를 얻지 못해 낙담하신 것 같습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이 특정한 불안이 매우 크고 역사가 깊기에,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지 않은 사람이 말해주는 어떤 이야기도 사실 그렇게 의미 있게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조언해줘도 소용없어. 당신은 이 고통을 머리로만 이해하잖아?’라는 일종의 억울함과 분노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지요.

이유가 무엇이든, 이런 정도의 마음이라면 타인의 조언이나 공감에 마음을 여는 것이 애초에 어렵게 됩니다. 심리학 이론에 ‘예스, 벗’(yes but)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알겠어 하지만…’이라는 태도로 상대방을 대하는 거죠. 동의하는 듯하지만 결국은 상대의 말을 인정할 수 없는 이유를 대는 겁니다. 안타깝지만 공감이나 조언을 아무리 멋지고 진심 어리게 해도 지금은 남편의 입장이 크게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지금은 내가 대화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보다는, 남편이 스스로 성찰하고 돌아보는 것이 더 중요한 상황으로 보여요.

내가 갖고 있는 자신감보다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압도적일 때 우리는 누구나 불안과 긴장을 느끼게 되지요. 저는 방송일을 10년 넘게 했는데도, 얼마 전 했던 한 녹화에서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대고 입이 바짝 타서 애를 먹었답니다. 모든 순간에 담대하고 전혀 떨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니까요. 그저 순간순간 조절하고 순간순간 나를 안아주며 살아가는 거지요. 사실 긴장하고 떠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긴장하고 떠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훨씬 문제가 됩니다.

혹시 남편은 상담치료나 약물치료를 얼마나 받으셨는지요? 상담을 몇 차례 받아보고, 약물을 몇 주 먹어보는 정도로 정신적 증상은 마법처럼 갑자기 좋아지지 않아요. 나와 잘 맞는 전문가를 만나야 하고 지속적으로 치료를 해야 합니다. 잠깐 노력한다고 해서 쉽게 좋아질 것이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힘들어 하지도 않았겠지요. 어릴 때 생겨난 트라우마 때문이든, 혹은 다른 이유가 중첩돼있든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치료와 개인적인 노력이 필요해요.

사실 남편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는 주요한 원인일 수도 아닐 수도 있고요. ‘어린 시절 트라우마 때문에 발표 불안이 생긴 것이다!’라고 완전히 확신해버린다면, 과거를 바꿀 수 없으니 현재도 바꿀 수 없다고 느끼게 되지요. 그 견고한 믿음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상담치료를 통해 개선해야 하는 부분일 겁니다. 단, 너무 구체적으로 조언하거나 공감하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하소연하면 그저 들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어요. “힘들었겠네, 당신이 나아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뭔지 생각나면 알려줘, 내가 도와줄게.” 지금은 이렇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응원하는 것으로 충분해 보입니다. 내 마음을 해쳐가면서까지 상대를 도울 필요는 없으니까요.

작가, 메디테이션 랩 대표

관계로 인해 고민이 생기셨나요? ‘곽정은의 단호한 관계 클리닉’의 문을 두드려 주세요. 보낼 곳: es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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