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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 맞는’ 무용담

등록 2008-05-22 14:49

번개 맞은 비행기는 쌍발 프로펠러기 ‘대시-8’이었다. ‘구명 튜브’인 의자를 사용할 일은 없었다. 남종영 기자
번개 맞은 비행기는 쌍발 프로펠러기 ‘대시-8’이었다. ‘구명 튜브’인 의자를 사용할 일은 없었다. 남종영 기자
[매거진 Esc] 남종영의 비행기 탐험
어쩐지, 시작부터 어딘가 불길했다. 공항의 코카콜라 자판기는 동전을, 그것도 둘이나 잡아먹었고, 기껏 잡은 창가 자리의 의자는 솜이 뜯기어 드러나 있었다. 승무원은 껌을 짹짹 씹으며 마이크를 들었다. “환영합니다,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코르도바 공항을 출발해 앵커리지 테드스티븐스 공항에 도착하는 ….”

알래스카 시골 마을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탄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사람들이 걸어서 탑승하는 탑승장 겸 활주로를 달려오른 비행기가 바퀴를 집어넣고, 실타래가 엉긴 것처럼 추상적인 쿠퍼강 삼각주가 창밖으로 멀어져 갔다. 앞자리 노인은 돋보기를 고쳐 쓰고 신문을 펼쳐들었다. 그가 앉기에 의자는 좁아 보였다. 2-2 좌석. 복도를 사이에 두고 두 좌석이 나란히 있는, 그러니까 우등고속도 아니고 일반고속 구성의 프로펠러 비행기였다. 자리 수도 일반고속을 능가하진 못했다.

좌석 안내하고, 기내 방송하고, 안전 시범을 보이던 ‘나홀로 승무원’은 비행기가 이륙하자 기내 서비스 카트를 끌고 나왔다. 저가 항공에 공짜란 없다. 커피나 샌드위치, 스넥을 팔고 그 자리에서 동전을 세어 거스름돈을 넘겨주고 있었다. 무엇을 먹나. 멀리서 다가오는 승무원의 카트를 기웃거리는데, 우지끈!

비행기가 ‘출렁’ 흔들렸다. 무르팍에 올려놓은 카메라의 전원이 갑자기 켜졌다.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가 켜졌다. 한손으로 벨트를 잡고, 한손으로 더듬더듬 앞좌석 포켓의 비상 탈출 안내서를 찾았다. 책자는 잡히지 않고 자꾸만 멀미봉지만 잡혔다. 면세쇼핑 안내책자 뒷면에서 끄집어 낸 안내책엔 탈출 모식도가 그려져 있었다. ① 의자를 떼어내세요 ②물에 빠지면 의자를 껴안으세요 ③어린이는 업고 타세요.

아, 이 비행기에는 구명조끼가 없었다. 어쩐지, 안전시범을 보이던 승무원도 ‘잡아당기고’‘불지’ 않고 손가락으로 비상구만 가리켰다.

어쨌든 비행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빠른 속도로 하강을 계속해 정시에 앵커리지 공항에 착륙했다. 그제서야 긴장의 끈을 푼 승객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기장은 기장실의 문을 열고 나와 소리쳤다. “번개였어요. 발전기가 하나 나갔는데, 뭐 나머지로도 날 수 있으니까.”

사실 ‘번개 맞는’ 비행기는 뜻밖에 많다. 비행기에 번개가 치는 건 대단히 큰 일은 아니어서, 그저 몸통에 얼룩 하나 생기는 정도라고 한다. 번개의 고압전류는 날개와 꼬리 뒷부분에 있는 방전장치를 통해 기체를 빠져나간다. 앞좌석 포켓의 탈출 가이드를 뒤질 일이 아니라, 어깨를 으쓱하며 그저 “응, 번개야”라고 한마디 하면 끝나는 것. 그러나 그것은 프로들의 세계다. 비행기 타는 횟수를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일반인들은 무용담에 이렇게 한 줄 남긴다. “벼락맞은 비행기 타 본 적 있어? 야, 그날 시작부터 불길했는데 말야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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