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저는 20대 후반 회사원입니다. 10대 후반, 일본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한국과는 다른, 아니 사실 국적의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다른 상황들을 경험해 왔습니다. 한국에서는 공부만 했던 터라 연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죠. 그런 상태에서 일본에 왔어요. 그런 저의 마음의 상태와는 달리 놀랄 만한 일들이 생겼어요.
저는 남들이 평가하기에 잘생긴 외모에 속합니다. 그 때문에 여러 여자들이 저한테 접근했었습니다. 제 직장이나 졸업한 학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꽤 그럴싸하니까요. 접근 방식이 술 마시고 갑자기 제 집에서 재워 달라고 하거나, 호텔에 대놓고 가자고 하거나,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저에게 성적으로 끌린다고 하는 식이었습니다. 겉모습은 멀쩡하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여자들이 저한테는 그런 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에 대해, 설마 모든 여자들이 이런 건지, 사랑에 대해 왜 이렇게 쉽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건지, 그들을 복잡하고 경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랑은 절대 얽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죠. 여자친구가 생긴 뒤 그녀와 첫 섹스도 남들에 비해 늦은 때에 했습니다. 처음에 사귄 여자친구도 저에게 첫눈에 반했다면서 접근했는데, 그 방식이 순수했고 이런 사람이라면 믿어도 좋다고 생각해서 사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과거의 남자친구와 연락을 계속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순간 신뢰가 무너졌습니다. 저를 유혹했던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망상마저 생기더군요.
결국 제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고 매달리는 그녀를 계속 뿌리쳤습니다.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이지요. 그 뒤로도 다른 여자들과 사귀게 되었는데, 비슷했습니다. 지금 당장 헤어지더라도 상처받지 않을 정도만 선을 긋고 연인 관계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최근 첫눈에 반한 여자가 생겼습니다. 웬만하면 제가 먼저 반하는 성격이 아닌데 말이죠. 문제는 또 발생했습니다. 또 이런저런 의심이 들고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자꾸 의심이 되니 그의 사소한 말 한마디 한마디도 신경이 쓰이더군요. 친구들 모임에서도 “누가 누구와 불륜 관계다”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그녀를 보면 의심만 커갑니다.
만약 이번 여자친구에게 또 상처를 받으면, 저는 더 이상 누구도 믿을 수가 없게 될 것 같아서 그게 너무 무섭습니다. 여자친구를 믿고 이대로 사랑해도 될까요?
이건 여자친구의 문제가 아니라 저의 문제겠죠. 그런데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답답하고, 남들에게는 달콤한 사랑이라는 감정이, 저에게는 너무 무섭고 불안하게만 다가옵니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고민남
A 네, 이건 여자친구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문제가 맞아요. 이젠 그 문제가 정확히 뭔지 제가 분석해 드릴게요. 일단 당신이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쌓아 올린 정의를 하나하나 생각해보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네요. 일본에서 회사 생활을 하면서는 ‘여자들이 왜 이렇게 먼저 들이대고 유혹하지? 여자들은 정말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전 ‘남친’에게 친구로서라도 연락했던 사람을 통해서는 ‘순수해 보이는 여자라도 믿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견고하게 쌓아 올리셨네요.
먼저 한눈에 반했던 지금의 여자친구에 대해서는 ‘나는 이미 속고 있을 수 있다’, ‘속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을 쌓아 올린 셈이고요. 네, 당신은 늘 그래 왔어요. 여성으로서 올바른 모습을 정해두고, 한가지라도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믿지 않기로 하고 경멸하고 멀리하는 것이 당신의 패턴이었습니다.
물론 누구나 ‘이건 절대로 참을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점은 존재합니다. 그것을 지켜갈 권리는 누구나 있죠. 다만 당신은 당신이 몰랐던 어떤 점을 알게 되거나 갑작스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 모든 것을 ‘여자들은 믿을 수 없어’라는 결론으로 끌고 가고 있네요.
당신이 어지간히 상대방을 파악했다고 생각한 순간, 관계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시험에 들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당신이 기대하는 모습으로만 모두 구성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니까요. 자유의지가 있고, 때로는 당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도 하고, 친구들과 있을 때는 좀 시시하고 바보 같은 농담도 즐기는 사람일 테니까요. 우리는 누구나 털면 먼지가 나오는 사람들이니까요.
저는 묻고 싶습니다. 전 남친에게 한 번 친구로서 연락한 것, 친구들과 시시한 농담을 하며 웃은 것, 이 정도 일로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과연 100% 합리적이었을까요?
원하는 모습을 정해둘 자유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나 강박적인 혹은 결벽적인 조건에 의해서 세세하게 정해질 때, ‘이 사람이 또 나를 속일 사람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경도되어 버릴 때, 우리는 오히려 눈앞이 흐려집니다.
절대 넘어지지 말아야지라고 긴장하는 순간 오히려 긴장해 스텝이 꼬여버리는 것처럼요. 그런 마음으로는 오히려 피하고 싶은 사람과 이어질 확률은 높아지고, 괜찮은 사람을 만나도 이별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사랑은 ‘네가 나를 속일 사람인지 아닌지 두고 보겠어’라는 마음이 아니라, ‘상처받더라도 나는 너를 믿어보겠다’는 담대함에서 시작되니까요.
내 마음도 못 믿고 상대방의 마음도 못 믿는데, 여기서 어떤 진실된 교류가 가능할까요? 당신은 수사관이 아니고 그녀들은 용의자가 아닌데, 당신은 마치 용의자를 대하는 수사관의 자세로 연애를 하고 있어요. 그것도 아주 피해의식으로 가득한 수사관 말이죠. 당신을 만나온 여자들도 본인들의 인생과 시간을 들여 당신을 만난 것입니다. 당신의 학벌과 직장이 얼마나 멋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것을 노렸다면 당신보다 훨씬 더 나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 분명 존재할 텐데, 그런 사람을 찾았어야 좀더 합리적인 선택이지 않았겠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 원해온 여성상에 대해 진심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건 다시 말해 조신하고, 성욕도 최소한으로만 있고, 상대방의 조건은 절대 따지지 않고, 시시한 농담에 정색하고…. 완전무결, 순수무취의 그런 여성을 찾는 당신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일이 되겠죠. 여자들도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걸, 때론 시답잖은 농담을 즐기고 강한 성욕을 느낀다는 걸,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어쩔 수 없이 거짓말도 하고 맘에 드는 사람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연기 비슷한 것도 한다는 걸 당신은 받아들여야 해요.
그걸 인정하지 못한다면, 당신의 연애는 누구를 만나도 동어반복이 될 겁니다. 예전처럼 그저 상처받지 않을 만큼 연애하다 깨지고, 자기 멋대로 상상하며 연애하다 또 깨질 겁니다. 이 괴로운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면, 당신의 여자사람친구들에게 뭘 물어볼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의 내 의심은 과연 합리적인 선택인가? 아니면 속고 싶지 않다는 알량한 두려움에 의한 반작용인가를 말이죠. 마음속 두려움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당신이 당신 스스로의 선택을 온전히 믿을 때, 그때 이 불신의 도돌이표도 함께 끝이 나지 않을까요?
곽정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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