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강아지와 함께 사는 24살 여자입니다. 강아지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갔다가 웹툰처럼 강아지 주치의와 ‘썸’을 타고, 주치의 선생님의 대시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저는 남자친구를 정말 사랑하고 있습니다. 매우 행복하게 연애하고 있어요.
남자친구는 저보다 5살 연상인데, 문제는 본인이 안정적인 직장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결혼을 기대하는 말을 자꾸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로스쿨에 재학 중이어서 로스쿨 졸업 후 안정적인 수입이 생길 것이라고 남자친구가 생각하는 것도 그런 말을 쉽게 하는 데 어느 정도 이유가 되는 것 같아요. 남자친구는 당연히 우리가 결혼할 것을 전제로 이야기하는데 저는 그게 참 불편합니다.
저는 인생에서 전혀 결혼 계획이 없고, 또 아이를 낳고 기를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오래오래 생각해서 내린 제 결정이기 때문에 바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1년도 채 만나지 않은 남자친구에게 그런 제 신념을 이야기하기도 오버인 것 같아, 남자친구가 언제쯤 결혼하자는 말에 “변호사시험 때문에 안 돼”, “취업 때문에 안 돼”라고 핑계만 대고 있긴 합니다.
곧 남자친구와 만난 지 1주년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 있을 것 같습니다. 서로 바라보고 있는 미래가 전혀 다른 데 그걸 언제까지나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고, 또 남자친구는 그냥 으레 연애 중에 하는 애정표현으로 “결혼하자” 한 건데 오버해서 “난 평생 결혼도 아이도 생각 없어”라고 말해서 좋은 관계를 망칠까 봐도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언제쯤 결혼을 하는 게 좋을지, 자신이 어디쯤에서 개원을 할 거고 어디쯤 신혼살림을 차리는 게 좋을지에 대해 말하는 남자친구의 구체적인 계획은 더 무섭습니다.
저는 언제까지 제 신념을 남자친구에게 비밀로 해야 할까요? 이러다가 프러포즈라도 받으면 어떡해야 하는 걸까요?
얼마 전에 남자친구의 선배가 자기 애인이 “결혼해도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고 말해서 헤어졌다며, 도대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소개팅 자리에서 미리 얘기를 하지 않는 건 무슨 매너 없는 것이냐고 말했던 남자친구의 태도를 보니 제 고민이 더 깊어졌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비혼을 결심한 여자
A 스물아홉 살의 수의사, 로스쿨에 다니고 있어 미래가 제법 안정적일 것으로 기대되는 다섯 살 연하의 여자친구, 미래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했을 때 강하게 찬성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단호하게 ‘아니오’라고도 말하지 않는 여자친구. 이것은 당신의 설명을 토대로 구성해본 남자친구의 현재 상황입니다. 네, 그래요. 남자친구 입장에서는 자꾸만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당신에게 재촉할 법하네요. 남자친구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게 뭔가요? 당신의 인생이고, 당신의 입장이 아닌가요? 그가 당신에 대해 얼마나 실망하든, 그와의 관계에 어떤 지각 변동이 생기든 말입니다. 당신은 ‘결혼 계획도, 아이 낳아 기를 생각도 없어’라는 단호한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 단호함은 그저 생각 안에서만 머물고 있을 뿐이죠. 정말 스스로 강력한 확신을 갖고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전에, 최소한 그에게서 '결혼'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자기 생각을 말했을 겁니다.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단호하게 표현할 수 없는 생각은, 신념이 아니라 공상에 가까운 무언가일 뿐이죠.
알고 있습니다. 비혼은 오랫동안 당신이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라는 사실을요. 하지만 왜 그런 소중한 결론을 곧장 말하지 못했을까요? 길 가던 사람도 아니고,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인데요. 당신도 또렷하게 인지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사회에서 결혼하지 않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연애만 하고 결혼 생각은 없다, 아이 생각도 없다고 말하는 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이해받기 어려운 선택이며 때로 ‘이기적’이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요. 결혼 적령기의 직업도 좋은 남자와 연애하는 것만으로, 잠정적인 결혼 레이스에 조인한 사람 취급을 받을 줄 당신은 처음엔 상상하지 못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현실은 그렇습니다. 설문 조사에서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응답하는 사람의 비율이 아무리 점점 하락세라고 해도, ‘사람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한국 사회의 믿음은 여전히 굳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혼을 생각하는 남성보다는, 비혼을 생각하는 여성의 비율이 비교적 높은 것도 현실이고요. 이런 분위기이니까, 비혼주의라거나 2세에 대한 계획이 없다는 건 비교적 특별한 선택에 속하고, 그런 선택을 하려고 한다면 상대방에게 먼저 알려주는 것이 예의 바른 행동이 되어 버리는 거죠.
생각해보세요. 지금 당신이 가장 듣기 두려운 말도, “비혼주의자이면서 대체 왜 나와 연애를 시작했고 여태까지 말을 안 한 거야? 왜 내 시간을 낭비한 거야?”라는 말이 아닌가요? 남자친구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무려 소개팅 자리에서부터 알려줘야 한다고 믿고 있는 남자인데요. 그런 남자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1년도 만나지 않은 남자친구에게 신념을 말하기엔 오버가 아닌가’라는 생각은 사실 앞뒤가 맞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의 절반은 당신이 원하는 걸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씩씩한 여성이지만, 어쩌면 나머지 절반은 ‘사랑하는 남자를 실망하게 해서는 안 돼’라는 지고지순한 여성상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진짜 내가 원하는 것’과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나’ 사이에서 운용의 묘를 잘 감당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을 존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가 진짜로 원하는 걸 갖기 위해서는, 그보다 덜 소중한 것을 눈 질끈 감고 놓아 버려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한 번은 옵니다. 아무것도 직면하려 하지 않은 채로, 원하는 걸 다 가질 수는 없어요.
각자의 욕망이 맞아떨어질 때, 우리는 서로 원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는 관계라 해도, 감춰져 있던 다른 욕망이 부딪히는 순간은 오게 마련이죠. 두 사람을 ‘썸’ 타게 하고, 지금까지 나름 행복하게 연애할 수 있었던 욕망은 욕망대로 존재하지만, 미래에 대해 각자 가진 욕망이 다르기에 지금 이런 상황이 찾아온 겁니다. 문제는 당신이 자신의 욕망에 대해 솔직하고 떳떳하지 못하고, 당신의 신념을 숨긴 채 문제를 직면하지 않으려 한 것이죠.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을 낭비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덜 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이제는 당신의 생각을 말해야 합니다. 당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남자라면, 당신의 뜻을 존중하고 그 후의 선택을 하겠죠. 그저 결혼할 만한 여자를 찾고 있었던 남자라면, 당신에게 1년 치의 분노를 쏟아낼 겁니다. 신념도 전하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파악하고, 이래저래 당신이 손해 볼 건 없네요.
곽정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