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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내가 아이스크림 시위에 나서는 이유

등록 2019-08-29 09:23수정 2019-08-29 20:29

마이클 부스의 먹는 인류
왜 아이스크림은 여름에만 먹나
전 세계엔 맛난 아이스크림도 많아
인도 쿨피·뉴욕 올리브오일 젤라토 등
유명 요리사 블루멘털은 희한한 레시피도 발표
최근 이사한 곳에 있는 아이스크림 집
겨울에 안 판다고? 화가 나 시위할 생각
해마다 아이스크림이 필수 음식 목록에 오르는 시기가 지나가고 있다. 한국의 여름은 지독하게 뜨겁고 습하니 아이스크림을 여러 개 먹거나 얼음을 깎아 산처럼 소복하게 쌓아 올린 뒤 설탕이 잔뜩 들어간 시럽을 끼얹어 먹는 것도 뜨거워진 몸을 식히기에 꽤 효과적인 방법인 듯하다. 하지만 문제 제기하고 싶은 게 있다. 독자 여러분은 당연히 뭔가 문제가 있으리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건 바로, 우리가 왜 여름에만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여름에만 아이스크림을 찾을 게 아니라 1년 내내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어린 시절에 본 장면이 또렷이 기억난다. 영국에선 1월이면 캠페인이 펼쳐졌다. 그 캠페인은 반려동물 유기를 멈추라고 호소하는 운동이었다. ‘반려견은 크리스마스만을 위한 게 아닙니다(A dog is not just for Christmas)’가 슬로건이었다. 버려진 크리스마스 선물용 반려견에게 1월의 영국 날씨는 너무 가혹하다. 나는 아이스크림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느낀다. ‘아이스크림은 여름에만 먹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사시사철 아이스크림을 핥고 목구멍으로 흘려보내야 하는 나 같은 인간에게 여름 한철은 너무 짧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사람들은 계절에 상관없이 1년 내내 젤라토(이탈리아식 아이스크림. 일반 아이스크림보다 공기 함량이 적어 밀도가 높다)를 먹어댄다. ‘브리오슈 콘 젤라토’라 불리는 아이스크림 샌드위치가 있는데, 시칠리아 사람들은 2월에 모닝커피와 브리오슈 콘 젤라토를 함께 먹는다. 그들은 이 일을 6월 어느 저녁에 파사자타(이탈리아 사람들이 저녁이면 거리를 거닐며 가벼운 산책을 하는 일)를 하며 젤라토를 후루룩거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시칠리아에서 먹는 아이스크림은 정말이지 입에서 살살 녹는다.

그러나 가장 훌륭하고, 가장 도전적인 풍미를 경험하고 싶다면 로마의 젤라토를 맛봐야 한다. 로즈메리, 모차렐라 치즈, 심지어 블루치즈 맛 젤라토까지, 이탈리아 수도를 거닐며 이 모든 맛을 경험해보는 것만으로도 여름 한철을 보낼 수 있다. 내가 ‘애정’해 마지않았던 젤라토가 있는데, 뉴욕 웨스트 빌리지의 어느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맛본 올리브오일 젤라토다. 단지 그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일주일 내내 그곳을 찾고 또 찾았다. 파리에서는 ‘품질은 우리의 열정이다’라는 사훈을 걸어놓은 베르디용(Berthillon·1954년부터 영업 중인 파리의 유서 깊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맛본, 그 유명한 산딸기 아이스크림도 사랑한다. 인도에도 아이스크림이 있다.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쿨피(Kulfi·인도와 그 주변 국가에서 먹는 전통 수제 아이스크림)인데, 우유와 생크림을 아낌없이 넣어 맛이 진하고, 먹고 나면 속이 든든하다. 큰 항아리에 쿨피를 가득 채운 상인들이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모습도 볼거리다.

터키 사람들은 아이스크림계의 마에스트로다. 놀라운 쫀득쫀득함과 쭉쭉 늘어나는 탄성을 자랑하는 돈두르마(Dondurma·터키 아이스크림)는 야생 난초의 구근을 말려 가루로 낸 살렙으로 만드는데, 이것이 매우 쫀쫀한 식감을 만들어낸다. 심지어 아이스크림을 칼로 썰어가며 먹어야 한다. 여름의 뜨거운 바람이 불어도 녹아 흘러내릴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오로지 돈두르마를 맛보기 위해서라도 터키에 가볼 만하다.

한국에서는 편의점에만 가도 기발하고 희한한 맛의 아이스크림이 많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종류는 팥이 풍성하게 들어가서 알갱이가 씹히는 아이스크림과 서울 명동에서 파는 기다란 소프트아이스크림이다.

영국에는 맛도 형편없고 뭔가 비누 냄새 같은 게 나는 듯하지만, 기가 막히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초콜릿 플레이크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파는 자판기가 있다.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셰프 중 한 사람인 헤스턴 블루멘털은 위대한 아이스크림 마니아다. 그는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베이컨과 달걀을 곁들인 아이스크림을 선보였고, 구운 아이스크림에 치즈를 올린 아이스크림 레시피를 공개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아이스크림(4m에 달한다) 제조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영국의 물리학자 니콜라스 쿠르티와 프랑스의 화학자 에르베 티스를 만나 친하게 지낸 뒤부터 액화 질소 아이스크림을 세상에 선보였다. 녹차, 라임, 보드카의 앙상블을 액화 질소로 순식간에 얼려 내놓는데, 그 아이스 볼을 입안에 넣고 굴리는 순간 감탄이 터져 나온다. 기사 작위라도 수여할 만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든 생각인데, 정말이지 아이스크림은 이 세상의 많은 먹거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음식인 것 같다. 그런 아이스크림을 여름만을 위해 아껴두다니.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세계 구석구석을 다닐 때가 많은데, 자주 아이스크림 금단 현상을 겪는다. 폼페이를 통째로 땅속에 묻어버린 전설의 베수비오산을 올랐을 때다. 그 화산 분화구에서 느껴졌던 비애감, 존재의 덧없음, 모든 인간적 노력의 헛됨은 곧 내가 그날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했다는 걸 떠오르게 했다. 화산 분화구가 하필이면 아이스크림의 고깔 모양과 닮았던 것이다.

내가 왜 갑자기 이처럼 사소한 문제에 열을 올리느냐고? 사실 최근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고, 시내 중심가에서 아주 훌륭한 피스타치오 젤라토를 파는 초콜릿 가게를 발견해 기쁨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은 색깔만 봐도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다. 맛있는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은 살짝 회색빛이 도는 희끄무레한 올리브색을 띠는데, 사실 딱히 군침 도는 색깔은 아니다. 하지만 먹어 보면 색깔 따위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걸 알게 된다. 봄날 햇볕 아래 막 올라온 잔디처럼 밝은 초록색을 띤다면 인공 색소, 그리고 어쩌면 인공 향료를 첨가했다는 뜻이다. 이런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 맛은 대개 아몬드 맛이 중심이다. 나는 내가 먹은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에 피스타치오 맛이 났으면 좋겠고, 색깔부터 틀려먹은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라면 미련 없이 떠난다.

그런데 새로 옮긴 우리 동네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는 겨울에 아이스크림 판매를 중단한다고 한다. 나는 지금 이 사실을 막 알게 된 참이다. 그래서 정식으로 항의할 생각이다. 그 가게 앞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지역구 국회의원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문자 폭탄이라도 보내야겠다. 힘든 싸움이 될 테니 그때까지는 이 훌륭한 아이스크림을 즐길 수 있는 만큼 즐겨야겠다.

글 마이클 부스(푸드 저널리스트), 일러스트 이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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