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ESC] “아직 닭을 안 들이셨나요?”

등록 2019-09-19 09:18수정 2019-09-19 20:54

마이클 부스의 먹는 인류
유럽·미국 힙스터들에게 부는 열풍, 닭 사육
아내의 강력한 제안에 부담스럽지만 OK
암탉만 9마리, 뜻밖에 즐거움 커져
보석보다 아름다운 달걀 수거
남은 음식 쪼아 먹는 모습 등
예상하지 못했던 뿌듯함 만끽
일러스트 이민혜
일러스트 이민혜

요즘 들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닭을 키우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오프라인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든 인터넷에서든 온통 그 얘기뿐이다. 댁은 아직 닭을 안 들이셨나요? 혹시 앞으로 닭 키우실 생각은 없어요? 달걀을 돈 주고 사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게 정말 기분 좋지 않나요? 그 집 닭들한테는 뭘 먹이세요? 여우들은 어떻게 퇴치하시나요? 닭들에게 이름은 지어주셨나요?

최근에 사람들을 만났다 하면 대화라고 나누는 게 대부분 이런 얘기다. 자급자족하는 삶을 즐기고, 경제적인 여유가 좀 떨어지는 편인 젊은 사람들, 즉 우리가 ‘힙스터’라고 부르는 미국과 유럽의 특정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닭이 필수 아이템, 그러니까 ‘올해의 아이폰X’ 혹은 네스프레소 머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한국에서는 귀농한 사람들이 닭장을 뚝딱뚝딱 짓고 닭을 키우기도 한다지만, 도시에서는 거주민 대부분 아파트에 살아 닭을 키울 일은 없는 거로 안다.

처음에 아내가 우리도 암탉을 장만해서 뒷마당에서 키우자고 제안했을 때, 아니 일방적인 통보를 했을 때 나도 꽤 회의적이었다. 나는 아이들 뒤치다꺼리도 해야 하고, 개도 돌봐야 하고, 텔레비전에서 중계되는 스포츠 경기도 종목별로 그때그때 다 챙겨봐야 하는 사람이기에, 여기서 또 책임감을 요구하는 일이 늘어나는 건 정말이지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 나와 함께 사는 그분의 생각은 달랐다. 아내는 내가 반대하거나 말거나 닭들을 모셔왔다. 우리 동네의 어느 얼리어답터 양반께서 자기가 키우던 닭들에게 일찌감치 싫증이 나버렸고,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닭과 장비 일체를 인수하게 됐다. 닭, 닭장, 울타리, 물이 똑똑 떨어지게 돼 있는 신기한 급수기(내가 보기엔 물리학의 법칙에 반하는 발명품), 그리고 유기농 사료 몇 봉지, 이 모든 걸 다해서(잠깐, 얼른 계산기를 좀 두드려봅시다), 그러니까 우리 닭들이 7420개의 알을 낳으면 본전을 뽑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뭐 괜찮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마당의 닭들을 볼 수 있다. 내가 정성껏 키우는 허브를 쪼아 먹으며 꼬꼬댁거리고 돌아다니고 있다. 갈색, 검은색, 흰색인 우리 집 닭들은 암탉만 아홉마리다. 수탉이 없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꼬꼬댁’과 ‘꼬끼오’의 데시벨 차이에 대해선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그런 면에서 잘 보면 고개를 주억거리며 귀뚜라미야 놀자, 쥐며느리는 어디 갔니 하며 돌아다니는 암탉들은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여우가 호시탐탐 엿보고 있지 않은지 가끔 고개를 들어 살펴보지만, 사냥꾼은 없고 날은 평온하다.

아내에겐 비밀인데 나는 아무래도 이 닭들과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요즘은 내 일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더뎌졌는데, 그게 한 시간에 한 번 정도 닭들이 알을 낳았는지 확인하러 들락날락하기 때문이다. 닭은 어두운 곳에서 알을 낳기 때문에 알을 낳기 편한 공간을 따로 만들어주어야 한다. 지푸라기를 잔뜩 구해다가 소파처럼 푹신하게 만들어줬는데, 닭장 문을 열고 하얀색 또는 갈색의 그 작은 보물들이 지푸라기 위에 살포시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의 흥분은 그 어떤 말로도 전달하기 어렵다.

내가 직접 기르는 암탉이 낳은 달걀을 수거할 때나, 닭들이 없었으면 쓰레기통으로 직행했을 남은 음식들을 닭들에게 먹일 때의 뿌듯한 기분도 말로 표현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딱딱해진 빵을 그대로 던져줘도 되고, 아들이 학교에서 받아와 처박아둔 장미꽃을 시들기 전에 닭장에 던져두면 부리에 립스틱을 바른 것처럼 묻혀 가면서 잘 먹는다. 한번은 수박 껍질을 준 적이 있는데 정말 이걸 먹을까 싶었으나 진짜, 아주 환장을 해서 달려드는 것을 보고 닭들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아무튼 이런 것들을 주는 대신 그 대가로 나는 기적에 가까운 것을 얻는다. 바로, 껍질 안에 들어 있는 한 끼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우쭐해지는 순간은 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 다른 사람들은 와인이나 꽃을 들고 오는데(아, 하품 나죠~) 나는 “우리 집 닭들이 갓 낳은 거예요!” 하며 빨간 리본으로 묶은 상자 속에 예쁘게 담은 계란 여섯알을 선물로 내밀 때다. 마치 러시아의 보물 ‘파베르제 달걀’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19세기 제정 러시아 시대에 보석 디자이너 카를 구스타포비치 파베르제가 만든 달걀 모양 귀금속. 빨간 리본을 묶어 상자에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가서 계란 진열대 앞을 지나갈 때면 마치 ‘대단히 감사합니다만, 이 돈은 조금 후에 초콜릿 코너에 가서 쓰겠습니다’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바지 주머니를 톡톡 두드리게 된다. 집에 가서 달걀흰자를 아낌없이 써서 부드러운 거품을 내고 ‘플뢰데볼레르 웨이퍼’(디저트 과자 일종)에 초콜릿을 입힌 이탈리안 머랭을 먹어야지, 라고 떠올릴 때의 그 만족감이란! 아무리 안 웃으려고 해도 히죽히죽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또 한 가지, 우리 가족은 예상치 못했던 풍요로움을 누리게 됐다. 모조리 암탉들이라 하루에 대여섯개의 달걀을 낳으니 거의 달걀에 파묻혀 죽을 지경이 된 것이다. 요즘은 머랭을 만들 때 달걀 여덟개를 쓰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치를 부리게 됐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노른자를 따로 모아두는 수고조차 하지 않는다. 하하하! 그러곤 금방 깨닫는다. 아이쿠, 노른자는 아이스크림 만들 때 쓰면 좋았을걸. 일본에서 배운 오믈렛도 가끔 만들어 먹는다. 달걀에 소금, 설탕, 약간의 미림(일본 맛술)을 넣고 종잇장처럼 얇게 만드는 이 음식은 럭비공 모양으로 달걀을 요리조리 만들어 가는 재미와 통조림 참치를 넣은 볶음밥과의 어울림이 환상이다. 식감을 더욱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우유를 부어주는 건 필수라고……

앗, 잠깐만! 닭들이 밖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고맙게도 닭들은 알을 낳고 나면 매번 알람을 요란하게 울려준다. 어디, 어디, 오늘 아침에는 알을 몇 개나 낳았는지 얼른 가서 좀 보고 와야겠다.

닭장에 가서 확인하고 방금 돌아왔다. 야호, 달걀을 네개나 더 거둬왔다! 보자보자, 그러니까, 이제 6312개만 더 모으면……

마이클 부스(푸드 저널리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손톱깎이 세계1위 ‘777’ 처량한 몸값 깎기 1.

손톱깎이 세계1위 ‘777’ 처량한 몸값 깎기

정대세 “너무 다른 남·북 라커룸, 하지만 프로란…” 2.

정대세 “너무 다른 남·북 라커룸, 하지만 프로란…”

[ESC] 이탈리아 중북부로 ‘느린 여행’ 떠나볼까 3.

[ESC] 이탈리아 중북부로 ‘느린 여행’ 떠나볼까

당신이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무협소설 10선 4.

당신이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무협소설 10선

여고생 폭주족들의 할말 못할말 ‘불만 폭주’ 5.

여고생 폭주족들의 할말 못할말 ‘불만 폭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