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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아라비안나이트의 나라에서 케밥을 주문하다

등록 2019-10-31 09:20수정 2019-10-31 18:58

마이클 부스의 먹는 인류

조급하게 케밥 주문한 나
베들레헴에 있기 때문
요즘 이스라엘·중동 음식 아는 이 많아

요리사 오토렝기의 활약 덕분

반목과 분쟁도 음식으로 해결할 수 있어

더없이 맛있었던 베들레헴의 케밥

일러스트 이민혜
일러스트 이민혜

나는 케밥을 사 먹으려고 줄을 서 있는 중이다. 그거야 뭐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지만 나는 꽤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래서 주인 양반이 별로 중요한 용건도 아닌 듯한 전화 통화를 어서 끝내고, 내가 시킨 음식을 당장 대령하도록 눈알이 빠지도록 쏘아보며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래야만 여기를 떠나 안전한 나의 렌터카로 무사 귀환할 수 있을 테니. 마침내 요리사는 내 억장이 무너질 정도로 느릿느릿 케밥을 건네주었다. 나는 순서만 기다리며 이미 제자리에서 달리기 시작한 계주 선수처럼 케밥을 건네받았다. 허둥지둥 샐러드바로 가 양파, 샐러드, 토마토 그리고 정체 모를 빨간 소스를 한 숟갈 크게 떠서 빵과 닭고기 조각 위에 얹는다. 여기서 끝인가? 아니다. 나는 다시 부지런히 케밥 아저씨에게 돌아가 나의 소중한 케밥을 건넨다. 그 아저씨는 내 기준으로는 너무나 여유만만하고 느려터진 속도로 케밥을 가져갈 수 있도록 포장해준다. 아, 복장 터지려고 한다. 마침내 포장된 케밥을 받아든 나는 밖에서 대기 중인 차로 재빠르게 달려간다.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가? 내가 베들레헴에 있기 때문이다. 다윗왕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인 곳. 그러나 요즘은 사실상 이스라엘에서 지어 올린 8m 높이의 ‘웨스트 뱅크’(국제법상 가자지구와 함께 공식적으로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지역) 장벽으로 둘러싸여 거의 노천 감옥이 돼버린 곳. 베들레헴은 이스라엘 안의 팔레스타인 영토다. 이스라엘인들은 그 지역 사람들을 안보에 위협이 되는 무리라 생각하고, 그래서 그들이 그 지역을 자유롭게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베들레헴으로 넘어가는 곳곳의 검문소에는 무장한 군·경찰이 지키고 있고 ‘이스라엘 시민들의 출입을 금지합니다.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으며 이스라엘 법에 위배되는 행위임을 알려드립니다’라고 쓰인 커다란 붉은 표지판이 버티고 있다. (엄청나게 무섭게 생긴 데다 반자동 소총까지 보란 듯이 차고 있는 상당히 공격적인 병력 한 분은 우리가 국경을 건너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가 여권을 소지하지 않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우리는 다른 방향에 위치한 검문소를 찾아 차로 한참을 이동해야 했다.)

내가 이스라엘에 온 이유는 늘 그렇듯 음식 이야기를 찾기 위해서다. 요즘은 일반 대중도 이스라엘이나 중동 음식을 전보다 더 많이 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스라엘 셰프 한 사람의 공이 상당히 크다. 그의 이름은 오토렝기(Ottolenghi). 그는 마돈나나 펠레, 미국의 전·현직 대통령인 오바마와 트럼프처럼 이름 하나만으로 전 세계에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오토렝기는 성이고 이름은 요탐(Yotam)이다. 그의 레시피로 말할 것 같으면 대개 유대교 율법보다 길게 끝없이 이어지는 재료 리스트를 기본으로 하며, 신선하고 풍미가 강렬한 지중해 식재료에 허브와 채소, 자타(za’tar) 같은 향신료 혼합물과 붉은 고추 말린 것을 켜켜이 쌓는 식이다. 오토렝기는 세상 사람들에게 수박 페타치즈 샐러드를 소개한 인물이다. 냉장고에서 썩어나는 수박을 처리하기에 좋은 이 샐러드는 깍둑썰기한 수박 위에 짭짤한 페타치즈를 던지면 끝나는 간단한 요리다. 나는 그가 쓴 글에서 타히니(참깨로 만든 소스로 중동에서 널리 사용한다)를 요리에 쓰는 법을 배웠는데 정말 영원토록 고맙게 여길 만한 가르침이다.

텔아비브에서는 오토렝기의 요리와 비슷한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었다. 허브로만 만든 화려한 샐러드, 시원한 요구르트 덩어리를 곁들인 ‘불맛’ 확 나는 구운 가지, 그리고 견과류가 들어간, 부드럽게 혀에 감기는 후무스(으깬 병아리콩에 오일과 마늘 등을 섞은 음식)는 먹고, 먹고, 또 먹었다. 중동에선 후무스가 없는 식탁이란 이야기가 없는 아라비안나이트란 말이 있을 정도지만 그곳을 떠나던 날, 안타깝게도 <예루살렘 포스트>는 인류가 더 이상 후무스를 먹지 못할 날이 가까워져 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다른 수많은 식재료와 마찬가지로 병아리콩도 지구 온난화에 위협을 받고 있다고.

이곳에선 요리 하나하나마다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수천년 동안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들려주며 살아온 땅이고, 아마 태초에 이야기가 시작된 곳이니 별로 놀라울 일도 아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2019년 반목과 분쟁, 유혈 상태로 인해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행복이나 감동과는 거리가 멀다.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나는 어쩌면 음식이 도움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물론 맛있는 케밥 하나가 세상의 모든 문제와 분쟁을 척척 해결해낼 수 있다고 우기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저녁, 식사할 곳을 찾아 자파(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 중 하나)로 나간 날 내가 보고 느꼈던 인상적인 모습을 여러분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그날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민감하고 정교한 나의 레스토랑 감별 안테나가 가장 괜찮을 거라 예상되는 식당을 선별해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음식을 이것저것 시켰다. 그리고 맥주 생각이 나서 음료 메뉴도 좀 갖다 달라고 했다. 그런데 웨이터가 그 식당에서는 술을 팔지 않는다고 했다. 알고 보니 내가 들어간 곳이 아랍 레스토랑이었던 것이다. 전혀 몰랐다. 그제야 식당을 천천히 둘러봤다.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 중에는 관광객이나 다른 지역 사람들은 물론이고 유대인이 많았다. 그러나 아무도 이 식당 주인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떤 종교를 믿는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장사도 엄청 잘되는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근처에 유대인이 운영하는 식당보다 훨씬 잘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선하고 좋은 재료로 다른 식당보다 음식을 더 신경 써서 정성껏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모습에서 희망을 본다. 미각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다.

혹시나 베들레헴의 케밥이 어땠는지 궁금해하시는 분이 계시려나? (별로 안 궁금해도 그냥 그렇다고 해주세요, 네네, 제가 말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정말 맛있었다. 내가 먹어본 케밥 중 가장 맛있는 축에 들었다. 어쩌면 독자들도 이미 예상했을지 모르겠다. 베들레헴은 히브루어로 ‘고기의 집’(House of Meat)이란 뜻이고 아랍어로는 ‘빵의 집’(House of Bread)이니까. 이 얼마나 클래식한 조합인가. 이보다 더 어울리는 한 쌍이 어디 있다고. 안 그런가?

마이클 부스(푸드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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