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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밸런타인데이 비극을 피하는 법은?

등록 2020-02-14 11:14수정 2020-02-19 17:31

마이클 부스의 먹는 인류
매년 닥치는 밸런타인데이
계획 잘하는 이들의 차지가 된 식당
셰프들에겐 가장 끔찍한 밤
우리 유부남들도 고민 커
집에서 정성스러운 요리 만들길 추천
지금 제철인 굴과 샐러드가 최고

어떻게 연례행사를, 매해 빠짐없이 벌어지는 일을 매번 깜짝 파티로 치를 수 있단 말인가. 영화 <맨 인 블랙>의 토미 리 존스처럼 은색 작대기를 상대방 얼굴 앞에 대고 기억을 싹 밀어버리지 않는 한, 아내는 지난해 밸런타인데이 때 우리가 뭘 했는지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밸런타인데이가 고도로 훈련받은 암살자, 프로페셔널 킬러처럼 조용히 내게 접근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나는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오는 것을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알아차렸을 때는 치명상을 입은 후겠지. 어쨌든 내 2월13일 하루 일과의 마무리는 집에서 가깝고 별점 높은 모든 레스토랑에 전화를 해서 혹시 두 명을 위한 자리가 아직 남아 있냐고 사정하는 것이다. “계산대 앞,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자리도 괜찮으니 그걸로 하나 예약해주세요”라고 설레발도 쳐보지만, 물론 남아 있을 턱이 없다. 특히나 로맨틱하기로 유명한 곳들은 짜증 나는 족속들이 몇 달 전에 진즉에 예약을 끝내놓은 상태다. 그들은 미리 계획 세우는 걸 좋아하고 머릿속에 세워둔 시뮬레이션에 따라 착착 행동을 진행해야 하며, 모든 것이 완벽하게 컨트롤되었을 때 만족하면서 으스대는 이들이다. 이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선물도 일찍 사서 12월5일에 미리 포장까지 해놓고도 남을 종족이며 2월에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해 그 전해 5월에 예약을 하는 이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아마 일찍부터 연금을 넉넉하게 준비했을 것이고, 속옷까지 다림질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일 것이다. 이들은 스카치테이프도 쓰고 나서 꼭 한번 접어둬서 다른 이들이 다음번에 쓰기 위해 시작점을 찾느라 헤매는 짓도 않겠지. 난 싫다, 이런 인간들.

그리하여 대개 나는 일 년 중 가장 로맨틱한 날의 외식을 멕시칸 요리 체인점이나 2월14일 딱 하루 빼고 일 년 내내 저녁 시간마다 텅텅 비어 한산하던 스페인 레스토랑에 가서 했다. 손님이 세 팀을 넘어서면 주방은 멘붕(멘탈 붕괴)에 빠져 아수라장이 되는데다가 한 시간도 넘게 기다려야 간신히 흙내 나는 음식 한 접시를 받을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아무 셰프나 잡고 한번 물어봐라. 2월14일은 일 년 중 가장 끔찍한 밤이라고 할 것이다. 끔찍하지 않으면 그건 셰프가 식당 문을 닫고 외식을 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렇다. 레스토랑은 꽉꽉 미어터지고 셰프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속된말로 크게 당길 수 있는 날이지만 밸런타인데이에 음식의 질을 따지려고 한다면 당장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고 거기서 아무거나 집어먹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2월14일은 모든 레스토랑이 자기네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최대치를 넘는 날이기 때문이다. 평소에 100미터를 15초에 뛰던 사람이 10초 만에 뛰어야 한다는 뜻이다. 밸런타인데이에 외식하는 사람들은 뭘 먹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셰프들은 분명히 알고 있다. 하물며 음식의 질을 따질 리가. 일 년 중 가장 로맨틱한 밤을 로맨틱하게 보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사람이 먹는 거에 신경을 쓸 리가 있겠는가. 남자 입장에서 보자면, 유부남들은 그 상서로운 밤을 위하여 이리저리 궁리해둔 것들이 과연 부인님을 만족하게 할 수 있을지 전전긍긍할 것이고 아직 미혼남들은 그저 그날 밤에 ‘로맨틱’의 종지부를 확실히 찍을 수 있을지 희망과 노심초사와 절망 사이를 오가며 고민할 것이다. 밸런타인데이에 잘 차려입고 외식하러 나온 여성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에 대해서는 미안하다, 모르겠다. 아무 생각이 없다. 섣불리 짐작하기도 싫다. 난 남자다. 이 질문은 나한테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모나리자가 무슨 생각을 하냐는 질문을 하는 거랑 똑같은 거다.

나는 여러분에게 집에 있을 것을 추천한다. 때론 반전과 생각의 대전환이 확실한 해결책을 제공한다. 당신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샴페인에 매겨진 터무니없는 바가지요금으로부터 소중한 지갑을 지켜내고, 낸 돈과 나온 음식 질의 터무니없는 반비례 관계 때문에 멘탈이 털리는 일도 막을 것이다. 다만 집에 있으려면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집에서 로맨틱한 요리를 해보자는 말이다. 자, 당신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는 당신이 집에서 무엇을 마련해주길 바랄 것인가.

글쎄, 경험자로서 얘기해보자면 굴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굴은 ‘극강’의 ‘최음제’이며 겨울이 제철인 식재료다. 특히 2월에 굴은 피크다. 애피타이저로서 굴은 별다른 요리가 필요 없는 그 자체가 완성된 요리다. 그저 잘 씻고 향신료 한두 방울만 떨어뜨리면 족하다. 벌거벗은 굴은 관능적이고 그 터지는 식감과 향은 사람을 신선하고 기운 넘치게 만들어준다.

메인 요리로는 너무 무거운 요리는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가령 오리를 익혀 속을 비운 다음 그 안에 잘 손질한 닭을 넣고 다시 오븐에 구워내는 그런 짓은 하지 말자. 몇 시간을 몸 바쳐 음식을 만들다 지쳐서 순간 신경질적으로 사랑하는 이를 대한다면 무덤을 파는 짓이 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다. 음식이 무거우면 더부룩해지고 그다음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유야 분명하지만, 알다시피 우리 애들도 보는 신문에 설마 나보고 쓰라는 건 아니겠지?

스파게티는? 스파게티도 당연히 안 되지! 스파게티를 어떻게 질질 흘리지 않고 먹는단 말인가! 그리고 그렇게 먹었다간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재치 있게 샐러드는 어떨까? 이 사이사이에 뭐가 낄까 봐 고민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마늘이 들어간 음식을 만들 거면 혼자 먹지 말자. 반드시 둘 다 먹도록 하자. 마늘 커플이 되자.

그리고 디저트로는, 여기서 잠깐. 밸런타인데이 저녁인데 디저트를 챙길 당신은 아직도 메뉴에만, 먹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단 말이야, 그렇다면 당신네 관계는 뭔가 한참 틀어진 것이다.

포기해라. 당신이 밸런타인데이에 만들어낼 수 있는 마법 비슷한 것도 아마 없을 것이다. 너무 슬퍼하지 말고 내년 밸런타인데이를 위해 적금을 붓자. 억 소리 나오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속옷까지 다려 입는 재수 없는 이들의 행렬에 한 번쯤 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마이클 부스(푸드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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