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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휘게, 휘게! 멀리 도망간 바이러스

등록 2020-08-07 13:28수정 2020-08-07 14:16

마이클 부스의 먹는 인류

한국과 휘게 문화의 나라 덴마크의 공통점
코로나19 전투에서 승리한 나라

휘게는 안락한 분위기 만드는 것, 그중 음식이 중요
양초, 벽난로, 장작, 붉은 와인, 페이스트리 등

덴마크인들의 항우울제 섭취량 때문이라고 폄하하기도
그건 억측! 행복 지수 1위인 이유 휘게 문화 때문

코로나19 바이러스와의 전투에서 눈에 띄는 승전고를 울리고 있는 나라가 딱 두 군데 있다. 한국과 내가 선택한 나라, 덴마크다.(본래 마이클 부스는 영국 저널리스트다.) 언뜻 보기에는 이 두 나라의 공통점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국과 덴마크는 서로 다르다. 전자는 인구가 동아시아에서 거의 5200만명에 육박하고, 후자는 유럽 대륙의 끝자락에 걸터앉아 있으며 인구수는 전자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540만명이다. 작지만 멋짐이 폭발하는 이 나라는 부티크 같은 국가다. 이런 사실과 상관없이 이 두 나라의 공통점이라는 게 있다면 대체 뭘까?

사실 알고 보면 꽤 많다. 두 나라 다 음악 취향이 끔찍하다는 점부터 꼽겠다. (농담이다. 농담이라고! 담당 편집자님은 농담이라는 말을 폰트 키워서, 굵게, 기왕이면 밑줄까지 쳐서 표시해주길 바란다. 내 <한겨레> 칼럼 조회 수를 높여보려고 어그로 끌어본 거다. 농!담!이!다!) 다른 공통점은 사회적 결속력이 강하다는 점이다. 덴마크와 한국은 결속력과 동질감이 강해서 촘촘하다 못해 빡빡한 사회다. 그리고 두 나라의 국민 모두 당국을 신뢰하고 시민사회에 대한 믿음이 있다. 서로서로 믿더라.

게다가 두 나라 문화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초인적인 힘을 내게 하는 에이치(H)로 시작하는 슈퍼파워 마법 같은 단어가 있다. 한국인에게 이 에이치는 당연히 ‘한’(恨)일 것이다.(나는 한국인이 발음하는 대로 ‘han’이라고 부른다. 비슷한 의미인 마음의 응어리란 뜻의 ‘바게지’라고 하지 않고 말이다.)

난 ‘한’이 유감없이 발휘된 덕분에 한국인들이 이 독한 코로나19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도 흔들림 없는 단호한 모습으로 바이러스의 고삐를 틀어쥐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노라고 생각한다. 덴마크의 에이치는 아마 한국인의 ‘한’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것 같다. ‘후가’라고 발음하는 휘게(Hygge)가 덴마크인들의 에이치 슈퍼파워다.

몇 년 전부터 덴마크가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은 덴마크에서 ‘휘게’라는 개념을 발굴해 새로운 개념의 ‘잘 먹고 잘살기’이자 개인적인 웰빙 현상인 것처럼 포장해왔다. 하지만 정작 덴마크인들은 휘게가 다른 나라말로 그리 쉽게 번역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 휘게의 번역은 불가능한 것이라며 딱 잘라 말한다. 둘 다 진실이 아니다.

휘게는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다. 휘게는 혼자 있든 친구들과 함께하든 그저 안락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덴마크 사람들은 만약 휘게 올림픽이라도 열리면 전 종목 금메달을 목에 걸고도 남을 사람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북유럽의 겨울은 혹독하다. 유달리 춥고 눈이 많이 오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진을 빠지게 하는 잿빛 회색 때문이다. 하늘을 전부 덮어버리는 두꺼운 구름층은 10월부터 내려와 사람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이듬해 4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잿빛 구름이 걷힌다. 그 전에는 어림도 없다. 덴마크인들이 1인당 소비하는 항우울제 양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1위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이다.) 이미 그들은 ‘코로나 블루’(코로나19로 생긴 우울한 감정)와 유사한 감정을 겪어 왔던 것이다. 그러니 덴마크인들이 이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유달리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건 무리도 아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대대로 집 안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삶에 특화된 사람들이니까.

음식은 휘게 라이프를 구성하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영역이다. 덴마크 음식이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요리는 아닐지 모른다. 이건 덴마크 사람들도 수긍하는 점이다. 하지만 투박할지언정 덴마크의 음식은 잿빛 겨울철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낼 때 먹는 먹거리로 이보다 더 적당한 건 찾기 힘들 정도로 완벽하다.

먼저 휘게의 레시피를 따르면 불부터 지펴야 한다. 대부분의 덴마크 집에는 벽난로가 있고 정원에는 예쁘게 잘 쌓아놓은 장작이 있다. 벽난로와 장작더미라니. 아무리 우중충한 집이라도 이 두 가지를 갖추고 있다면 온 집 안에 색채가 곁들지 않을 수 없다. 양초도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을 한다. 덴마크인들은 양초에 무슨 한이라도 맺혔나(아, 한은 한국인들 것인데!) 7월 아침 식탁에도 양초를 올리더라!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덴마크 사람들은 음식으로 서로를 북돋울 수 있다는 점이다. 날씨가 정말 안 좋아지면 덴마크인들은 아주 크고 지방도 많은 돼지고기를 준비해 오븐에 넣고 2~3시간 천천히 익힌다. 오븐에서 돼지고기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익어가는 동안 덴마크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돼지고기보다 훨씬 더 중요한 페이스트리와 쿠키, 케이크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한다. 감히 단언컨대 덴마크인들이 만드는 이 제과제빵이야말로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음식이며 가장 널리 알려진 덴마크 음식일 것이다. ‘대니시페이스트리’(여러 겹의 얇은 층과 결이 생기도록 만드는 덴마크식 빵)는 이스트와 아주 많은 양의 버터와 설탕이 들어간다. 덴마크가 코로나19 대응 1단계로 봉쇄 조처를 내렸을 때 슈퍼마켓에서 유일하게 동난 물품이 바로 이스트였다. 전 세계적으로 품귀 현상을 빚었다는 휴지는 오히려 넉넉해서 구입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덴마크에 사는 대다수는 집에서 빵을 만들 때 ‘사워도 스타터’(Sourdough starter·시큼한 밀가루 반죽을 만들 때 필요한 효모나 세균)가 필요하다. 나는 이스트로 제대로 발효시키지 못하고 공기 중의 효모균에 기대어 시큼한 반죽을 만들어 계속 쓰고 또 썼다. 이스트가 있지만 풍미를 살리기 위해 사워도를 만들어 호밀빵을 만드는 것과 이스트가 없어서 사워도를 만들어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대니시페이스트리의 기원은 사실 덴마크가 아니라 오스트리아이지만, 뭐 상관없다. 덴마크인들은 이미 덴마크만의 요리로 정착시켰으며 이 요리들은 덴마크인들이 휘게스러운 주말을 보내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되는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집마다 고유의 빵을 만들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동네 빵집에 보내서 ‘비엔나 브레드’(Vienna Bread)를 사온다. 덴마크인들은 비엔나브레드를 ‘무거운 페이스트리’라고 부른다. 그리고 코로나19 기간에도 빵집들은 내내 문을 닫지 않았다.

그리고 휘게스러운 겨울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빠뜨려서는 안 되는 절대 재료가 있다. 뭐냐고? 바로 술이다. 덴마크인들은 마시는 걸 좋아한다. 그랬으니 칼스버그 맥주가 태어난 것일 게다.(‘아마도 제일 좋은’이 칼스버그 맥주의 모토다.) 그리고 그 무엇도 큰 와인 잔에 가득 따른 레드와인과 돼지고기 요리, 그리고 대니시페이스트리보다 휘게의 따뜻하고 몽롱한 연회의 감정을 더 잘 정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휘게에 관한 책을 사는 걸 두려워 말자.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 책은 좋은 것이다. (참고로 나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북유럽 요리 문화 탐방서를 냈다.) 게다가 앞에서 휘게의 기본 요건을 설명했으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당장 집에 가서 휘게를 해볼 수 있다. 벽난로는 한국의 주거 상황에 적용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양초 몇 개 켜는 거로 충분히 대체 가능할 것이다.

지난 40년 남짓 한 세월 내내 덴마크인들이 행복 지수 평가에서 지구 상에 있는 모든 나라 가운데 랭킹 톱을 차지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다. 혹자는 덴마크인들이 항우울제를 많이 먹어서 그렇다며 애써 깎아내리려 들겠지만, 나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면, 휘게의 힘이요, 휘게 덕분이라고 자신 있게 답하겠다.

글 마이클 부스(푸드 저널리스트), 일러스트 이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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