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ESC] 밤마다 서울 한복판 빈대떡을 꿈꾸다

등록 2020-08-21 14:47수정 2020-08-21 15:02

코로나19로 닫힌 세계 이제 갈 수 없는 나라들
서울 냉면·파리 과자·도쿄 초밥들 꿈에 나와

매일 밤 나는 꿈을 꾼다. 매일 밤 나는 음식에 관한 꿈을 꾼다. 매일 밤 나는 전 세계 곳곳의 진미를 찾아다니는 꿈을 꾼다. 서울에서 들이켰던 살얼음 낀 냉면 한 사발, 파리 파티시에 숍 앞 진열대에 정리되어 있던 보석같이 아름다운 과자들, 일본에서 보았던 윤기가 좌르륵 흐르는 초밥들이 매일 밤 줄지어서 꿈에 나온다. 그리고 먹기 직전에, 입안에 넣기 직전에 이 음식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아무리 손을 뻗어 봐도 잡을 수 없는 음식들. 고통스럽다.

지난 10년간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곧 떠날 여행 계획이 잡혀 있지 않았던 적도 없었고, 그 여행을 위해 예약을 분주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방금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적이 대부분이었기에 머릿속에서 계속 여행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손발이 묶이고 입과 혀가 꽁꽁 묶인 답답한 상황에 가슴이 저린다.

그러고 나서 내게 이상한 일이 생겼다. 그 이상한 현상은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 올려주는 에스엔에스(SNS) 사진들을 볼 때마다 일어났다. 친구들은 아마 이런 심정으로 사진을 올렸을 것이다. 부산에 정말 흥미로운 가옥이 한 채 있어, 혹은 서울의 궁궐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후원이 있어, 한번 구경해봐 등. 그들은 이렇게 전 세계 랜드마크의 사진을 올리는데, 어찌 된 것이 사진을 본 내 머릿속은 다른 해석이 펼쳐졌다. ‘오! 저 박물관에서 길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진짜 맛있는 숯불갈비집이 있는데!’ 혹은 ‘저 사찰 근처 모퉁이에 있는 식당에서 진짜 환상적인 국수를 먹었는데!’ 등. 여행하며 식도락 관련 책을 몇 권이나 펴낸 작가로서 나의 상상력은 급기야 이런 식으로 작동하고 만 것이다.

아마도 지구상의 그 어느 곳을 가든 그 장소만이 선사하는 음식의 기억이 내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당분간은 내가 이 장소들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좌절감에 망가진 내 뇌는 그 기억들을 어떻게든 뇌에 붙잡아두고 남겨두기 위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최고로 강도를 높여서 말이다.

그 결과 뉴욕 사진을 보면 쉐이크쉑(Shake Shack)버거와 랍스터롤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게 되었다. 랍스터롤. 랍스터롤…. 소시지 대신 랍스터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 핫도그 빵에 올린 다음에 반드시 마요네즈와 레몬을 뿌려줘야 진미를 내는 랍스터롤 말이다. 뉴욕에 가면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답정너’, 랍스터 샌드위치. 그뿐이랴. 일본 홋카이도의 명소, 요테이산(羊蹄山)의 사진을 볼 때면 근처 바닷가에서 갓 잡아 올린, 큼직한 가시들이 무섭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최상급 성게 생각에 군침이 돈다. 서울은 거무죽죽한 고사리와 숙주, 고기가 듬뿍 들어간 빈대떡에 김치를 얹어서 입에 한가득 넣고 우물거린 다음, 적당한 시점에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을 때의 그 쾌감이 떠오른다!

여행 간 곳과 그곳의 음식 연계해 사고

이것은 새로운 분야인 ‘미식 지리학’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그동안 꾸준히 찾았던 장소와 음식의 연계성 찾기는 ‘미식 지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심리지리학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는데, 심리지리학(Psychogeography)이란 20세기 초에 나타난 아방가르드 예술 콘셉트로 사람이 자기 환경을 기억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변화를 주고자 했던 시도다.

나는 어떤 장소를 기억하고 해석할 때 음식을 통해서 그 장소를 기억한다. 어떻게 보면 식탐의 저주와도 비슷하다 하겠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부르짖던 마들렌 타령과는 비교도 안 된다. 프루스트 효과보다 한층 진일보한 것이랄까. (적어도 프루스트는 자기 앞에 놓인 조개 모양 아몬드 향 나는 스펀지케이크를 먹을 수라도 있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 전체가 록다운 되어버린 이 시점에 그 능력이 내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제 내가 갈 수 없는 장소를 지도에 핀으로 표시하는 대신 난 새로 생긴 내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음식으로 하여금 그 나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기로 했다. 맛, 향, 질감, 색의 기억을 이용해서 시간을 더듬어 가다 보면 그 음식을 함께 먹었던 이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음식을 만든 이들이 생각난다.

이 방식으로 이번주에 나는 한국을 돌아다녔던 기억뿐만 아니라 프랑스도 기억했다. 너무나 사랑했던 프랑스의 프로방스에 있던 치즈 가게의 고소한 냄새를 떠올렸고, 스페인의 발렌시아에서 먹었던 찬란한 황금빛 파에야를 머릿속에 그려보았고 타이완 야시장의 지글거리는 소리와 연기까지 맛있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미식 여행은 20년 전부터 비약적으로 발달

지금 나는 한국인이 꿈꾸는 미식 지리학이 궁금해

전 지구를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이 죽지 말아야 할 수백,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 교토의 한 가게가 갓 만든 따끈따끈한 두부를 먹지 못하는 나의 슬픔 따위, 나폴리에서 피자를 먹지 못한 나의 애통함 따위는 코딱지만큼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음식은 우리에게 본능적이고, 지적이며 감정적인 수준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음식엔 우리가 방문했던 곳들을 떠올리게 하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능력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음식은 당신을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다. 아니, 사람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경관과 역사와 문화까지 연결하며 당신을 그 순간, 그 장소로 단숨에 데려다주는 강력하고 오묘한 힘이 있는 전달체인 것이다.

맛 따라 세계여행(culinary tourism)은 20년 전부터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특히나 한국이 음식 관광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불고기, 떡볶이, 순대에 국한한 얘기가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이가 한식이 궁금해서 한국을 찾을수록, 한국의 전통 음식들은 궁합이 맞는 식재료들과 융합하는 식으로 재탄생해 왔다. 하지만 아직도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 나의 미식 지리학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에 가서 한국 음식을 먹는 것을 꿈꾸고 있을 때 대체 한국 사람들은 어디에 가서 무엇을 먹는 것을 꿈꾸고 있을까? 그들도 꿈자리에서 나름의 미식 지리학을 열심히 펼치고 있겠지. 그러고 있을 어떤 한국인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글 마이클부스(푸드 저널리스트), 일러스트 이민혜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연애하러 ‘러닝 크루’ 모임 하냐”는 이들은, 대부분 달리지 않아요 [ESC] 1.

“연애하러 ‘러닝 크루’ 모임 하냐”는 이들은, 대부분 달리지 않아요 [ESC]

전국 방방곡곡 맛난 음식과 술 총정리 2.

전국 방방곡곡 맛난 음식과 술 총정리

[ESC] 오늘도 냠냠냠: 5화 이태원동 명동교자 3.

[ESC] 오늘도 냠냠냠: 5화 이태원동 명동교자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4.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ESC] 오늘도 냠냠냠: 43화 무교동 이북만두 5.

[ESC] 오늘도 냠냠냠: 43화 무교동 이북만두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