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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진짜 맛집은 소개하지 않는 음식 작가들

등록 2020-11-13 07:59수정 2020-11-13 09:11

일러스트 이민혜
일러스트 이민혜

조금 전에 음식점 비평을 하는 친구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친구는 지금 서울에서 저녁에 외식할 만한 곳에 대한 글을 준비 중이고, 내가 2~3년 전부터 서울을 몇 차례 방문했던 것을 알고 있는 터라 식당 추천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딜레마에 빠져버렸다. 내가 알고 있는 서울 최고의 맛집을 추천해주고 신뢰할 만한 미식 탐험가로서의 고고한 지위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그레이 리스트’에 올린 음식점의 이름을 알려줄 것인가.

‘서울 맛집’ 추천해달라는 친구 ‘그레이 리스트’에 올린 곳 추천

‘그레이 리스트’는 나랑 도쿄를 근거지 삼아 음식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친구가 어느 날 밤 저녁 도쿄 아사쿠사에 있는 진짜 맛있는 야키토리(닭고기 꼬치구이) 전문점에 갔다가 만들어낸 말이다. 음식 관련 글을 쓰는 작가들 모두 ‘그레이 리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작가들도 우리가 사용한 ‘그레이 리스트’와 유사한 개념의, 자기들만의 단어가 분명 있을 것이다.

최근에 친구가 발견, 아니 발굴해낸 그 야키토리 집에 대해서 나와 내 친구는 미묘하게나마 한층 더 완벽해진 야키토리 맛에 광분했다. “아 참, 그래도 이곳에 대해서는 쓰면 안 돼!!” 친구의 얼굴에 한 줄기 당혹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가는 듯 싶더니만 쐐기를 박았다. “야키토리에 대해 쓸 일이 있으면 버드랜드에 가라고 써.” 버드랜드는 긴자에 있는 정말 괜찮은 야키토리 전문점이고, 도쿄에 가면 꼭 들러야 할 맛집으로 온갖 외국 여행 잡지에 소개된 곳이다.

버드랜드는 친구가 보기에 안전한 추천 맛집이고, 기사로 보증할 수 있는 곳이다. 동시에 그 기사를 보고 밀려드는 관광객들 때문에 앞으로 예약 잡는 게 어렵게 된다고 해도 그리 아쉽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버드랜드에서 두 번 다시 저녁 식사를 못 하게 된다 해도 커다란 손해는 아닐 거라는 얘기다. 버드랜드는 우리가 만장일치로 ‘그레이 리스트’에 올린 곳이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블랙리스트에 오르기 직전의 맛집을 적어 넣는 목록이 ‘그레이 리스트’가 아니다. ‘그레이 리스트’에 올려놓은 음식점들은 완벽할 정도로 ‘적당한 곳’이다. 적당히 추천해도 욕먹지 않고 엄청나게 유명해져도 아쉽지 않은 식당 목록을 말한다. 동시에 음식 작가들이 이미 몇 번이나 가서 먹었고 다시 취재 가서 또 먹어야 한다고 해도 행복하게 갈 수 있는 곳들이다. 우리가 탄성을 내지른 그 야키토리 전문점 같은 곳을 가기 전에 들르는 중간지대 같은 식당 목록이다. 이 목록에 올린 식당들은 인테리어나 분위기, 때로 지나치게 좋은 전망 때문에 음식의 맛이 못 따라갈 수는 있어도, 그래도 막상 가면 맛있게, 잘 먹을 수 있는 곳들이다.

‘그레이 리스트’는 맛난 곳이지만 사람 몰려 못 가도 아쉽지 않은 곳

‘그레이 리스트’에 올린 음식점을 우리 식도락 작가들이 추천한다고 해서 우리의 몸값이 떨어진다거나 혹은 월등히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곳에 단골 아닌 손님들이 밀려들어 앉을 자리가 없게 된다 해도 그리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대체 왜 <뉴욕 타임스>가 됐든, 아니면 비행기에 놓여 있는 안내 책자가 됐든, 같은 음식점만 추천하는지 궁금했다면 부끄럽긴 하지만 이것이 그 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장담하건대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그레이 리스트’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이 사는 곳에 찾아와 당신에게 음식점을 추천해달라고 했을 때 당신도 우리와 같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꽤 괜찮은 집을 소개해주기는 하겠지만,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곳은 절대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못 보던 얼굴들, 귀찮은 뜨내기들 때문에 금요일 밤에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런던의 ‘그레이 리스트’를 뽑자면, 예산이 넉넉한 이들에게는 ‘더 리츠 런던’을, 경비를 살짝 조정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디너 바이 헤스턴 블루멘털’을 추천하겠다. 유명한 요리사 헤스턴 블루멘털이 운영하는 ‘디너 바이 헤스턴 블루멘털’은 하이드공원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데, 솔직히 언제 가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곳이다. 하지만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사고를 하는 런던인들은 절대 저녁을 먹으러 가지 않을 곳이라고 말이다.

파리 ‘그레이 리스트’에 올린 레스토랑을 꼽자면 ‘셰 라미 장’을 들어야겠다. 피카소, 헤밍웨이 등이 머물렀다는 파리의 유명한 거리인 레프트 뱅크에 있는 전형적인 비스트로(규모가 작은 소박한 술집)다. 레프트 뱅크는 센강 왼쪽 강둑을 따라 형성된 파리의 대표 맛집 거리이기도 한데, 한참 전, 그러니까 1920년대부터 이미 여길 소개한 여행 잡지를 보고 온 사람들로 북적되는 곳이다. 세계적인 수준의 식사를 자주 해 자신을 ‘인싸’라고 믿는 이들에게 편안한 코스를 제공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프랑스 수도 파리의 저녁 풍경을 잘 아는 이들이라면 ‘셰 라미 장’에서 돈을 낭비하느니 가판대에서 크레이프를 사 먹을 것이다.

뉴욕이라면 나는 사람들을 기꺼이 데이비드 창의 식당으로 보내버릴 것이다. 정말 맛있게 식사할 것이다. 아마 본인들이 뉴요커 아닌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차이나타운이나 32번가에 늘어선 한국 식당에서 창의 식당 밥값의 반의반 값으로 비슷한 음식을 맛볼 수도 있다.

음식 작가 누구나 ‘그레이 리스트’ 있어, 가장 못 믿을 존재 아닐까?

도쿄에서는 ‘그레이 리스트’에 오른 전형적인 식당이 ‘반드시 가봐야 할 음식점’으로 잡지에, 또 웹사이트에 소개되곤 한다. ‘부타구미’, ‘긴자 카가리 라멘’ 등. 식당 소개 글을 쓴 작가가 정말 게으른 사람이라서 최소한의 자료 조사도 안 한 사람이라면 스시 장인 오노 지로의 초밥집을 추천할 것이다. 오노 지로의 초밥집을 예약하라니,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거긴 그냥 불가능한 곳이다.

“외국 음식에 대해 쓰는 작가들이 대체 왜 이런 데를 추천하는지 모르겠다니까.” 한 일본 음식 저널리스트가 내게 한 말이다. “도쿄에 훨씬 더 좋은 데가 얼마나 많다고.” 글쎄, 나도 안다. 그런데 나 역시 똑같다. 일본에서 정말 좋은 음식점들은 예약하기가 굉장히 어렵고, 누군가 기사를 쓰거나 혹은 블로그 포스팅을 하거나, 하여튼 누군가가 그 장소를 한 번 추천해버리면 그 추천은 온라인상에서 영원히 회자된다. 다른 저널리스트들이 그 정보를 활용해서 꼭 먹으러 가야 할 곳 리스트에 올려버리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그러니 이 점을 알아야 한다. 음식 관련 글을 쓰는 작가들이란 탐욕스럽고 최고로 이기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먼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을 입에 꽉꽉 채워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이란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들이야말로 어디 가서 먹어야 하는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에 관한 한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존재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알아차렸으리라 믿는다. 내게 메일로 ‘서울 맛집’을 물어본 친구에게 난 ‘서울 그레이 리스트’를 보냈다.

마이클 부스(푸드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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