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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우리는 벼를 심는다, 바다가 모든 것 쓸어간 절망을 딛고

등록 2021-03-11 07:59수정 2021-03-11 09:20

3월11일이 되면 10년 전 일본 덮친 쓰나미 생각나
일본 최대 곡창지대 강타한 재앙에도 희망 찾는 농부들

2011년 3월11일. 일본에 재앙이 덮친 날로부터 10년이 되었다. 내 마음속 ‘3·11’ 10주년이다. 2011년 3월11일, 쓰나미가 일본 북부의 많은 지역을 집어삼켰다. 쓰나미가 지나간 지역은 초토화되었고 거의 1만6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도 붕괴했다. 나 역시 3월11일이 되면 가족과 친구를 잃은 사람들, 집을 잃고 생계를 잃은 사람들, 상처를 입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과 같은 심정이 된다.

쓰나미의 직격탄을 맞은 도호쿠 지방(아오모리현·이와테현·미야기현·아키타현·야마가타현·후쿠시마현 등)은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곡창지대다. 그 말인즉슨 쓰나미 재앙이 지나 간 후에 일본은 식량 공급과 수출에 치명타를 입었다는 뜻이다. 그 지역 농부들도 심각한 피해를 봤다. 후쿠시마현 고리야마에서 쌀 재배를 하는 한 농부를 알게 되면서 피해 상황을 더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후루카와 가쓰유키는 내 책 <쌀의 의미>에도 등장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잠깐 소개하자면, 후루카와는 질 좋은 쌀을 생산하기 위해 잘게 간 굴 껍데기가 주재료인 약초 가루를 밭에 비료로 뿌리는 이다. 굴 껍데기 가루는 매우 비싸서 1헥타르당 100만원 정도이고, 그런 식으로 농사를 짓고 난 후 수확한 쌀은 제초제와 화학 비료를 쓰는 이웃 농부의 쌀에 견줘 가격이 절반밖에 안 된다. 그런 방식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지 2년 뒤 후루카와는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명망 있고, 엄격한 쌀 경쟁 대회에서 참가자 2000명을 물리치고 우승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2004년부터 5년 연속, 그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결국 우승한 마지막 해에는 경쟁자 4000명을 물리쳤는데, 주최 측인 오사카 쌀 재배 노동조합은 특별한 다이아몬드 상을 주면서 그에게 대회에 더는 참가하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사실 잘된 일”이라고 했다. “가을에 대회가 다가올 때마다 말도 못 하게 힘든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정말 미칠 거 같았고 너무 초조했죠.”

나는 후루카와를 ‘3·11 재앙’이 벌어진 이후인 10월께 처음 만났다. 그때 나는 그의 추수를 도와주며 쌀농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내 아들, 애스거와 에밀도 함께 가서 모내기를 거들었다.

쌀을 심는다는 것은 허리가 부서지는 일이다. 찐득하게 젖은 흙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일한다는 것은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일이다. 아이들은 쌀농사의 모든 과정에서 나보다 일을 잘했다. 종일 힘들게 일했다. 기계로 하는 수월한 일뿐만 아니라 논에서 벼 줄기를 모으고, 커다란 진흙더미를 들어 올리는 힘든 일도 열심히 했다.

나는 그 경험으로 농부와 농부가 재배한 쌀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예전에 나는 흰쌀은 영양 가치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몸에 좋은 비타민과 미네랄은 쌀을 하얗게 하기 위해 벗겨낸 쌀겨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디저트로 채울 수 있는 배를 왜 쌀로 채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난 흰밥에 통조림 연어나 우메보시 같은 짭짤한 걸 넣은 오니기리의 미네랄 풍미를 즐기게 되었다. 또 아주 꼼꼼히 쌀밥을 짓는 일을 즐긴다. 쌀이 소중해 단 한톨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심정이다. 그리고 이젠 슈퍼마켓에서 파는 쌀이 아무리 비싸도 절대 불평하지 않는다.

재앙 후 두 아들 데리고 일본 방문해 모내기한 나
쌀 한톨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 귀한 경험
재앙 때 푸드트럭 몰고 피해 지역에서 라면 끓인 이도 있어
공포와 비극, 상실감에도 쓰러지지 않고 일어선 이들은 감동

‘3·11 재앙’으로 생긴 후쿠시마산 농산물에 대한 편견 때문에 후루카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듣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의 농장은 핵발전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심지어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도 현실은 냉혹했다. ‘후쿠시마산’이라는 마크는 한때 일본에서 최고의 제품을 뜻했지만, 똑같은 마크가 갑자기 저주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많은 농부가 농사를 포기했다. 몇몇은 자살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루카와는 이 모든 걸 이겨냈다. 그가 소비자에게 가닿을 쌀 판로를 스스로 개척한 일과 도쿄 등 대도시에서 그가 생산한 쌀의 팬이 생긴 이야기 등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 한쪽이 뭉클해진다.

그저 한 줄기 비치는 작디작은 희망의 빛일 수도 있지만, ‘3·11 재앙’ 이후 그 작은 빛줄기가 많아지고 있는 것도 목격된다.

나도 사실 내가 일본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늘 일본을 핑크빛 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한국인들이 내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유로 일본에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일본이 현재 사회적, 경제적 진통을 겪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양성평등의 문제에 있어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경제적 불평등과 한숨 나오는 직장 문화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마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한 지역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다른 지역 사람들이 기꺼이 도우리라는 것을 말이다.

이 이야기는 이미 내 책에서 한번 쓴 적 있다. 센다이에서 라면 전문점을 운영하던 하야사카 마나아키의 이야기 말이다. ‘3·11 재앙’이 일어나기 2~3년 전에 하야사카는 라면의 면을 뽑는 기계에 팔이 딸려 들어가는 사고가 발생해 오른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해야 했다. 그는 어떻게든 왼손만으로 라면 만드는 일을 훈련했다. 그는 원래 오른손잡이였다. 난 그가 정말 보기 드물게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다음 이야기가 설명될 테니까. 쓰나미가 몰려왔을 때 그는 즉각 행동을 취했다. 그의 라면집 ‘우푸신’은 쓰나미의 피해를 당하지 않았지만, 그는 초등학생 지원 프로그램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푸드트럭을 몰고 재앙의 진앙지로 달려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라면을 먹이기 위해서 말이다. 쓰나미가 쓸어버린 1년 동안 그는 피해자들을 위해서 라면 10만 그릇을 만들었다.

그렇게, 내가 10년 전 그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공포와 비극과 상실감을 느끼지만 후루카와와 하야사카, 그 밖의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도 같이 떠오른다. 그들은 비극의 면전에서 함께, 당당히 맞서 거대한 힘을 발휘했다.

글 마이클 부스(푸드 저널리스트), 일러스트 이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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