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1일이 되면 10년 전 일본 덮친 쓰나미 생각나
일본 최대 곡창지대 강타한 재앙에도 희망 찾는 농부들
일본 최대 곡창지대 강타한 재앙에도 희망 찾는 농부들
쌀 한톨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 귀한 경험
재앙 때 푸드트럭 몰고 피해 지역에서 라면 끓인 이도 있어
공포와 비극, 상실감에도 쓰러지지 않고 일어선 이들은 감동 ‘3·11 재앙’으로 생긴 후쿠시마산 농산물에 대한 편견 때문에 후루카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듣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의 농장은 핵발전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심지어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도 현실은 냉혹했다. ‘후쿠시마산’이라는 마크는 한때 일본에서 최고의 제품을 뜻했지만, 똑같은 마크가 갑자기 저주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많은 농부가 농사를 포기했다. 몇몇은 자살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루카와는 이 모든 걸 이겨냈다. 그가 소비자에게 가닿을 쌀 판로를 스스로 개척한 일과 도쿄 등 대도시에서 그가 생산한 쌀의 팬이 생긴 이야기 등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 한쪽이 뭉클해진다. 그저 한 줄기 비치는 작디작은 희망의 빛일 수도 있지만, ‘3·11 재앙’ 이후 그 작은 빛줄기가 많아지고 있는 것도 목격된다. 나도 사실 내가 일본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늘 일본을 핑크빛 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한국인들이 내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유로 일본에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일본이 현재 사회적, 경제적 진통을 겪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양성평등의 문제에 있어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경제적 불평등과 한숨 나오는 직장 문화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마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한 지역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다른 지역 사람들이 기꺼이 도우리라는 것을 말이다. 이 이야기는 이미 내 책에서 한번 쓴 적 있다. 센다이에서 라면 전문점을 운영하던 하야사카 마나아키의 이야기 말이다. ‘3·11 재앙’이 일어나기 2~3년 전에 하야사카는 라면의 면을 뽑는 기계에 팔이 딸려 들어가는 사고가 발생해 오른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해야 했다. 그는 어떻게든 왼손만으로 라면 만드는 일을 훈련했다. 그는 원래 오른손잡이였다. 난 그가 정말 보기 드물게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다음 이야기가 설명될 테니까. 쓰나미가 몰려왔을 때 그는 즉각 행동을 취했다. 그의 라면집 ‘우푸신’은 쓰나미의 피해를 당하지 않았지만, 그는 초등학생 지원 프로그램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푸드트럭을 몰고 재앙의 진앙지로 달려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라면을 먹이기 위해서 말이다. 쓰나미가 쓸어버린 1년 동안 그는 피해자들을 위해서 라면 10만 그릇을 만들었다. 그렇게, 내가 10년 전 그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공포와 비극과 상실감을 느끼지만 후루카와와 하야사카, 그 밖의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도 같이 떠오른다. 그들은 비극의 면전에서 함께, 당당히 맞서 거대한 힘을 발휘했다. 글 마이클 부스(푸드 저널리스트), 일러스트 이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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