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희 기자
김양희 기자의 맛있는 야구 / 야구가 정말 하고팠다. 야구를 하면 그냥 좋았다. 하지만, 그의 집은 가난했다. 한달에 몇만원씩 하는 야구회비를 낼 형편이 안됐다. 홀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손만 잡곤 했다. 막내의 꿈을 깨기는 싫었지만, 현실은 녹록찮았다. 어머니의 속앓이를 알고 야구를 포기하려던 찰나, 그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있었다. 선생님이었다. 강동우(35·한화)에게 김능삼 선생님은 대구 칠성초등학교 시절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월급이 많지도 않았는데 1년 넘게 그에게 야구회비는 물론 유니폼과 장비 살 돈을 쥐어줬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김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강동우는 지금 그라운드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몇해전에야 겨우 김 선생님과 조우했다. 한 팬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강동우는 “대구 방문경기 때 운동장에 찾아오셨는데, 옛날보다 머리는 빠지고 얼굴이 조금 까매지기는 했지만 단번에 선생님을 알아봤다”고 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님은 고등학교 동창의 장인이기도 했다. 그처럼, 김 선생님도 주변 사람들에게 야구를 고파했던 어린 소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타향살이에 지쳐있던 어린 강민호(23·롯데)를 일으킨 것은 제주 신광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던 안명숙 선생님이었다. 포항중학교에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갈 때 선생님의 편지를 읽으며 버텨냈다. 비록 지갑 안에 소중하게 간직했던 편지는 지갑과 함께 잃어버렸지만, 그는 지금도 기쁜 일이 생길 때면 선생님에게 전화를 건다.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베이징올림픽 때도 그랬다. 선생님은 늘 “잘하고 있으니 부디 다치지만 말아라”며 제자를 걱정한다. 에스케이 투수 채병용(27)을 야구선수로 이끈 이도 군산초등학교 3학년 담임이던 고순애 선생님이었다. 당시 문제아들과 어울리며 말썽만 일으키던 그에게 선생님은 야구공을 건넸다. 채병용은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지금도 방황만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모레는 스승의 날이다. 한쪽에서는 교권이 무너졌다고 성토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존경할 만한 스승이 없다고 한숨쉰다. 그래도 누구나 가슴 한켠에 묻어두고 있는 그 이름, ‘선생님’ 아닌가.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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