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중 20살 이하(U-20) 남자 축구대표팀 감독이 30일 서울 서초구의 한 실내 축구연습장에 앉아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아르헨티나에서 ‘김은중호’의 운명을 바꾼 첫 장면은 단연 F조 조별리그 1차전 프랑스와 경기(5월23일) 선제골이다. 전반 22분께, 상대 코너킥을 끊어낸 뒤 강상윤(전북)-김용학(포르티모넨스)-이승원(강원)으로 이어진
군더더기 없는 역습이 무주공산이 된 프랑스의 뒷마당을 가로질렀다. 중앙 미드필더가 기점(강상윤)과 종점(이승원)을 도맡은 공격 패턴이었는데, 과감하게 최전방 꼭짓점으로 치고 나간 이승원의 움직임이 빛났다. 김은중호는 프랑스를 꺾었고(2-1) 이후 20살 이하(U-20) 월드컵 4강까지 내달렸다.
지난달 30일 서울의 한 실내축구연습장에서 만난 김은중 ‘전’ 20살 이하 남자 축구대표팀 감독은 이 장면을 마음에 들어 했다. 김 감독은 “(이승원은) 아무런 정보도 없이 대학 경기 보러 가서 그 자리에서 뽑은 선수”라고 했다. 대표팀 사령탑에 부임(2021년 12월)한 뒤 김 감독은 곧장 전국 대학 경기부터 돌았고, 지난해 2월 통영에서 당시 단국대 신입생이었던 이승원을 발견했다. 그는 “2선에서 공격 침투에 능한, 제가 구상하던 공격적인 유형의 미드필더를 그때 승원이가 보여줬다”라고 회상했다.
김은중호 멤버는 그렇게 한 명 한 명 현장에서 그러모은 원석들이다. 김 감독의 설명을 빌리면 이 세대 선수들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연령별 국제대회가 멈춰 서면서 대표팀 소집조차 받은 경험이 없었고, 시기도 마침 대입과 프로팀의 갈림길에 선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기 때문에 소속도 훈련도 없이 3개월가량 방치된 상태였다. 언론에 의해 ‘골짜기 세대’라고 명명됐던 이들에게는 이승우(2017)나 이강인(2019) 같은 대형 스타만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증명할 기회도 없었던 셈이다.
한국 20살 이하(U-20) 남자 축구대표팀의 이승원(앞줄 왼쪽 셋째)이 지난달 11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라플라타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3 국제축구연맹(FIFA) 20살 이하 월드컵 3·4위전 이스라엘과 경기에서 페널티킥으로 골을 넣은 뒤 동료들과 기뻐하고 있다. 라플라타/연합뉴스
가용한 “선수 풀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도 없었”고, “선수들 몸 상태도 엉망이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월드컵 본선까지 약 1년6개월 앞둔 시점, 김 감독은 그간 방임됐던 한국축구의 재목을 차례로 선별했고, 그들에게 기회를 줬다. 이날 대화 중에도 “지도자의 역할은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던 그는 “처음부터 선수들에게 ‘우리 팀에는 베스트 11이 없다, 경기장에 나가는 선수가 베스트 11이다’라고 이야기했다. 본인들이 준비를 못 하고 있으면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없으니까”라고 했다.
선수들은 온 힘을 다해 응답했다. 지난 봄
20살 이하 아시안게임(4강) 때만 해도 첫 세계대회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김 감독)던 이들은 석 달 뒤 프랑스를 물리치고, 이어지는 조별리그 2차전에서는 온두라스에 두 골을 먼저 내주고도
따라잡는 저력(2-2 무승부)을 보여줬다. 특히 김 감독을 놀라게 한 것은 연장 혈투로 치달았던
8강 나이지리아전(1-0 승)이다. 내심 “8강을 목표”로 준비했다던 그는 “8강까지 치르면 다섯 경기다. 우리 선수들이 가진 경기 체력의 한계가 여기라고 봤는데, 이겨내더라”라고 말했다.
자신의 한계와 세간의 무관심, 세계의 강호들을 모조리 이겨내고 김은중호는 금의환향했다. 스포트라이트가 눈부신 한편, 김 감독은 이면을 짚는다. 그는 “아시안컵 끝나고 월드컵 사이 세 달 간 소속팀 돌아가서 경기를 뛰고 온 선수가 배준호(대전) 한 명이었다”라며 준비 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으로 실전 감각을 꼽았다. 김 감독은 “실제 경기를 뛰는 체력과 감각은 훈련으로 절대 채울 수 없다”라며 선수들의 현실에 맞춰 월드컵 본선에서 ‘실리 축구’ 전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부연했다.
김은중 20살 이하(U-20) 남자 축구대표팀 감독이 30일 서울 서초구의 한 실내 축구연습장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이들에게 더 많은 실전 기회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김 감독은 “우리 선수들이 프로 팀에 돌아가서 선배들과 경쟁하는 일은 버거운 게 사실”이라며 “프로 구단마다 21살 이하 팀을 두고 산하 리그를 운영하면 어린 선수들도 매주 경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언을 내놓기도 했다. 아울러 김 감독은 유소년 선수 육성 만큼이나 유소년 지도자 육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한국 지도자들도 해외 진출을 통해 세계 축구 트렌드를 습득하는 일이 중요하다”라고 보탰다.
지난달 14일 귀국 후 언론사 인터뷰 등으로 대회를 준비하던 시절 만큼이나 분주한 나날을 보낸 김 감독은 이날 일정을 끝으로 한동안 숨 고르기에 들어간다. 스스로도 “도전이었다”는 지난 18개월의 시간을 곱씹으며 차분하게 다음 행선지를 모색할 예정이다. 그는 “성과를 냈을 뿐 저도 과정 속에 있다”라고 했다. 여름 초엽, 무명의 골짜기를 넘어온 김은중호는 통째로 한국축구의 자산이 됐다.
박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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