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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도 치욕도 반복된다…여자월드컵 강타한 ‘언더도그 돌풍’

등록 2023-08-04 15:05수정 2023-08-04 17:18

[호주·뉴질랜드 여자월드컵 조별리그 결산]
독일·한국·모로코 물리고 물린 혼돈의 H조
피파 랭킹 10위권 강호 3팀 조별리그 탈락
한국 여자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3일(한국시각) 호주 호주 브리즈번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3 국제축구연맹(FIFA) 호주·뉴질랜드 여자월드컵 H조 3차전 독일과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은 뒤 함께 기뻐하고 있다. 브리즈번/EPA 연합뉴스
한국 여자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3일(한국시각) 호주 호주 브리즈번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3 국제축구연맹(FIFA) 호주·뉴질랜드 여자월드컵 H조 3차전 독일과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은 뒤 함께 기뻐하고 있다. 브리즈번/EPA 연합뉴스

한국은 이번에도 격랑의 중심에 섰다. 다만 희극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콜린 벨 감독의 지휘 아래 4년여 여정을 이어온 한국 여자 축구대표팀이 3일(한국시각) 2023 국제축구연맹(FIFA) 호주·뉴질랜드 여자월드컵 H조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거두며 거함 독일을 좌초시켰다. 앞선 두 경기에서 연패하며 8년 만의 16강 목표가 사실상 무산됐던 한국은 ‘잃을 것 없다’는 각오로 최종전에 나섰고, H조 마지막 경우의 수를 혼란 속에 몰아넣었다. 선제골을 넣은 조소현(토트넘)은 경기 뒤 “1차전부터 이렇게 뛰었으면 좋은 경기 보였을 텐데 아쉽다”라고 했다.

조소현의 득점은 독일 축구의 월드컵 역사에 전례 없는 악몽으로 이어졌다. 이번까지 9번의 여자월드컵에 모두 출전해 8번 조 1위를 차지했던 피파 랭킹 2위의 독일이 사상 처음으로 조별리그에서 대회를 마감했다. 조별리그 1승1무1패(승점 4점). 세 경기에서 네 골을 터뜨린 득점 선두 알렉산드라 포프(볼프스부르크)는 한국과 경기 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라며 허탈해 했다. 스포츠전문매체 ‘디애슬레틱’은 “여자월드컵 역사상 가장 큰 충격일지 모른다”라고 헤드라인을 뽑았다.

독일 대표팀의 미드필더 샹탈 헤이글이 한국과 경기에 비기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뒤 허탈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브리즈번/로이터 연합뉴스
독일 대표팀의 미드필더 샹탈 헤이글이 한국과 경기에 비기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뒤 허탈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브리즈번/로이터 연합뉴스

독일의 조기 퇴장은 남자월드컵 데자뷔다. 독일은 2018년 러시아 카잔에서 한국에 0-2로 패하며 조별리그 탈락 수모를 겪었고, 4년 뒤인 지난해 카타르월드컵에서는 일본과 첫 경기를 1-2로 그르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두 대회 연속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초유의 기록을 남겼다. 이제 이 기록은 여자월드컵까지 더해 ‘9개월 사이 남녀 월드컵에서 연속 조기 퇴장’으로 업데이트됐다. 이 굴욕사에 두 번의 방점을 찍은 한국에 일본까지, 독일 축구는 동아시아와 악연을 이어가게 됐다.

충격에 휩싸인 건 독일 뿐이 아니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독일을 비롯해 캐나다(7위), 브라질(8위)까지 랭킹 10위 안에 드는 여자축구의 강호가 세 팀이나 16강 문턱을 넘지 못하고 짐을 쌌다. 도쿄올림픽(2021) 여자축구 챔피언 캐나다는 마지막 경기에서 개최국 호주에 0-4 대패를 당했고, 우승 후보 브라질은 프랑스전 패배(1-2)와 마지막 자메이카전 무승부(0-0)에 발목이 잡혔다. 두 나라를 대표하는 축구 영웅 크리스틴 싱클레어(캐나다·포틀랜드)와 마르타(브라질·올랜도)는 아픔 속에 마지막 대회를 마쳤다.

이번까지 월드컵만 6번째 출전한 브라질의 전설 마르타가 지난 2일 마지막 경기 뒤 관중석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멜버른/EPA 연합뉴스
이번까지 월드컵만 6번째 출전한 브라질의 전설 마르타가 지난 2일 마지막 경기 뒤 관중석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멜버른/EPA 연합뉴스

여기에 랭킹 14위 중국(D조 3위, 1승2패)과 16위 이탈리아(G조 3위, 1승2패)까지 ‘업셋’(하위 팀의 승리) 희생양이 됐고, 방심한 강자들이 빠진 자리에는 나이지리아(B조 2위, 1승2무), 자메이카(F조 2위, 1승2무), 남아프리카공화국(G조 2위, 1승1무1패), 모로코(H조 2위, 2승1패)가 들어섰다. 피파 랭킹을 보면 나이지리아는 40위, 자메이카는 43위, 남아공은 54위, 모로코는 72위다. 여자축구 랭킹은 신뢰할 수 없는 숫자라고들 하지만, 40위권 바깥에서 불어닥친 언더도그 돌풍을 예상한 이는 없었다.

가장 놀라운 이야기를 쓴 건 모로코다. 아랍, 북아프리카 국가로는 처음 여자월드컵 본선을 뚫어낸 모로코는 첫 경기 독일전 대패(0-6)에 아랑곳 않는 경기력으로 한국(1-0)과 콜롬비아(1-0)를 연달아 제압해 첫 월드컵에서 16강 티켓을 따냈다. 특히 마지막 콜롬비아전 승리 뒤 모로코 선수들이 경기장에 모여 휴대폰으로 한국과 독일의 경기를 숨죽여 지켜본 장면은 지난해 카타르월드컵 한국 남자 대표팀을 떠올리게 했다. 결승골 주인공 아니사 라마리(갱강)는 “함께 모여 폰을 들고 기도했다”라고 했다.

모로코 대표팀의 공격수 파티마 탕누트(오른쪽)가 3일 호주 퍼스 렉탱귤러 스타디움에서 콜롬비아를 꺾은 뒤 독일이 한국과 비기면서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동료들과 환호하고 있다. 퍼스/AFP 연합뉴스
모로코 대표팀의 공격수 파티마 탕누트(오른쪽)가 3일 호주 퍼스 렉탱귤러 스타디움에서 콜롬비아를 꺾은 뒤 독일이 한국과 비기면서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동료들과 환호하고 있다. 퍼스/AFP 연합뉴스

레날 페드로스 모로코 감독은 “이번 월드컵에는 놀라운 경기가 쏟아졌다. 스포츠란 이런 것이다. 아무것도 정해진 건 없다. 우리도 그 일부가 됐다”라고 말했다. 모로코는 2009년부터 남녀 축구 선수 양성을 위한 아카데미 등 인프라에 꾸준한 투자를 이어왔고 2020년에는 여자 프로축구리그를 출범시켰다. ‘비비시’(BBC)는 이런 사실을 짚으며 “모로코의 성공은 수년간 여자축구에 투자한 결과이고, 이 성취는 이번 대회에 참가한 몇몇 국가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라고 평했다.

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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