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나팔수 경연무대로
1930년 우루과이에서 힘겹게 닻을 올린 월드컵은 2회 대회 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당시 경제공황의 회오리가 월드컵에도 불어닥친 것. 1931년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총회에서는 당분간 대회를 연기하자는 안이 나오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권력을 잡고 있던 무솔리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파시즘의 정당성을 알려 국민들의 단합을 유도하기 위해 그는 스타디움을 짓고, 적극적인 유치작전에 나선다. 1898년 부터 시작해 당시에 이미 유럽 강호로 성장한 이탈리아 국내리그의 인기도 한몫을 했다.
1934년 이탈리아월드컵은 새로운 중계매체들의 경연장이기도 했다. 파시즘의 홍보가 주목적이었던 만큼 경기장엔 국제전화를 포함한 보도용 시설이 설치됐고, 발명된 지 얼마 안된 라디오를 통해 경기상황이 지구촌으로 전해졌다. 또한 영화 카메라에 기록된 경기장면을 48시간 후면 이탈리아 각지에서 볼 수 있었다.
“우승하지 못하면 모두 사형”이라는 무솔리니의 주문, 안방의 이점, 한 수 위의 기량 등으로 이탈리아는 우승컵을 차지했고, 무솔리니는 목적을 달성했다. 결승에서 이탈리아에 패한 체코의 문지기 안타 자보는 “졌지만 우리 11명은 살았다”며 살벌했던 대회 분위기를 비꼬기도 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탈리아월드컵이 스포츠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시초가 됐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독일이 준결승에서 체코에 1-3으로 패하자 귀국한 선수단을 집단 구속시켜 버렸다. 무솔리니를 ‘따라잡기’한 히틀러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열어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멍에를 씻고 자신감을 회복한다. 이는 1970년대 남미와 아시아의 독재자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스포츠를 오염시키는 데 ‘참고서’가 됐다.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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