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가 국제적 멸종위기종인 제주 남방큰돌고래를 법인격으로 인정하는 ‘생태법인 제도’를 추진한다고 13일 밝혔다. 고래연구센터 제공
☞한겨레 뉴스레터 H:730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h730’을 쳐보세요.
“우리는 10년 전 수족관 돌고래 제돌이와 친구들을 자연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제 그들을 인간의 동료로 이해하고 권리를 존중하는 ‘생태법인’이 만들어진다고 하니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생태법인은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인식과 태도에 근본적 전환을 가져올 것입니다.”
13일 제주시 연동 제주도청에서 열린 ‘생태법인 제도 도입 제주특별법 개정 기자회견’에서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생태법인 제도화 워킹그룹 위원장)는 생태법인 제도 도입을 ‘역사적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한겨레가
2012년 3월3일치 1면으로 불법 포획 당한 뒤 돌고래쇼를 하며 고통받아온 제돌이에게 자유를 주자는 야생방사 운동을 조명한 지 11년 만에 맺은 결실이다.
제주도는 이날 브리핑을 통해 “국내 최초로 생태법인 제도를 도입해 제주의 환경·생태적 가치를 지키고 국내 생태환경 정책의 새로운 표준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제주도는 생태법인 제도 마련을 위해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제주특별법) 개정안 2안을 마련한다.
첫 번째는 ‘법인격 부여안’으로 남방큰돌고래에게 직접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방식이고, 두 번째 안은 도지사가 도의회의 동의를 받아 특정 생물종 또는 핵심 생태계를 지정하는 ‘생태법인 창설안’이다. 도는 내년 총선 이후 국회에 요청해 두 법안을 발의할 계획이다. 또 늦어도 2025년에는 남방큰돌고래를 생태법인 1호로 지정하기로 했다. 제주도는 제도 도입을 위해 지난 3월부터 학계, 법조계,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생태법인 제도화 워킹그룹을 운영해왔다.
불법 포획 당한 뒤 돌고래쇼를 하며 고통받아온 제돌이에게 자유를 주자는 야생방사 운동을 조명한 2012년 3월3일치 1면.
제주도가 이날 발표한 생태법인(Eco Legal Person) 제도는 생태적 가치가 있는 동물이나 식물, 생태계를 법적 권리 주체로 인정해 ‘법인격’을 부여하는 제도로 국내에서는 2020년 제주대 진희종 강사(언론홍보학)가 처음 제안했다. 현행법에서 인간이 아닌 기업체를 법인으로 인정해 이익과 권리를 보장하는 것처럼 생태적 가치가 있는 동식물, 생태계를 생태법인으로 인정해 서식지를 지키고 삶을 누릴 권리를 존중하겠다는 취지다.
2003년 경남 양산 천성산에 서식하는 도롱뇽이 터널 공사 착공금지가처분 신청을 냈고, 2018년에는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산업에 반대하는 산양들이 소송을 냈지만 ‘당사자 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각된 바 있다. 그러나 생태법인의 법적 근거가 마련될 경우 자연과 동물이 이제는 ‘법적 권리 주체’로 인정받게 된다. 즉 지금도 폐그물 등 해양 쓰레기, 해상풍력발전, 돌고래 선박 관광 등으로 서식지 침해를 겪고 있는 돌고래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생태 후견인’을 통해 소송 등 법적 다툼을 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생태법인 제도가 동물의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과도한 개발을 막고 생태계를 보전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저지 헌법소원 청구를 대리하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김도희 변호사는 “오염수 방류나 해양 투기는 돌고래 서식지에 악영향으로 직결된다. 만일 돌고래들에게 생태법인으로서 법인격이 있었다면 바로 소송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앞서 공론화만으로도 돌고래들의 주요 서식지인 대정읍 앞바다의 해상풍력발전단지 개발 계획이 중단된 만큼, 생태법인은 공고한 인간중심주의에 균열을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민변은 지난 8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저지 헌법소원에 남방큰돌고래를 청구인으로 포함한 바 있다.
13일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생태법인 제도화 워킹그룹 위원장)과 오영훈 제주지사(오른쪽)가 제주시 연동 제주도청 기자실에서 제주남방큰돌고래의 생태법인 지정 추진에 관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제주도 제공
이날 제주도의 브리핑에 앞서 진행된 ‘워킹그룹 4차 회의 겸 주민 간담회’에서 해녀 홍옥희씨는 돌고래 생태법인이 해녀의 어업권 보존과도 연결된다고 했다. 홍씨는 “지난 60년 동안 제주 탑동에서 물질을 해왔다. 돌고래들은 우리 말을 잘 알아듣는다. ‘물알로’(물 아래로) 가라고 하면 그리 가고, 해녀들이 물질하면 상어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아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돌고래들을 탑동에서 못 본 지 8~10년이 되어간다. 공존의 경험이 어린 해녀들에게까지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오영훈 제주지사는 한겨레에 “생태법인 제도가 속도를 내게 된 배경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영향을 받는 제주 바다와 생계에 큰 타격을 입게 되는 해녀, 어업인들의 사정도 있다. 물론 낚시 어선이나 관광 선박 등 피해를 볼 수 있는 분들에 대해서는 보상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국민 공감대 형성이 가장 중요하리라 본다”고 밝혔다.
워킹그룹에 참여한 박태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생태법인 제도는 일종의 ‘권리 플랫폼’으로 디딤돌을 놓아 남방큰돌고래 외에도 다른 자연물로 확대될 수 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제돌이에게 자유를 찾아준 지 10년이다. 우리 한국, 제주도만의 특별한 입법 방식이 될 생태법인이 그 흐름에서 시작됐다. 자연-인간 관계의 패러다임 혁신을 가져올 생태법인이 빠른 입법으로 제대로 자리 잡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