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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마음대로 물러지지 않는 ‘약콩 인생’이여

등록 2007-03-08 17:29

<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창비 펴냄. 9800원
<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창비 펴냄. 9800원
잠깐독서 /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와 소설집 <처녀치마>의 작가 권여선(42)씨가 두 번째 소설집 <분홍 리본의 시절>을 내놓았다. 표제작을 포함해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렸다.

권여선 소설의 주인공들은 뚜렷한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지니지 못한 주변부적 존재들이기 십상이다. 표제작의 주인공은 서른 문턱을 넘은 나이에 하는 일 없이 신도시 오피스텔에 이사 와서 지내는 여성이다. 사교에는 젬병인 주인공은 우연히 대학 시절 남자 선배가 가까운 아파트 단지에 사는 것을 알게 되고 선배 부부와 친해져서 서로의 집을 오가며 음식을 나눠 먹게끔 된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선배 부부의 우아한 언행 뒤에 감추어진 속물적 본질이 까발려지는 한편 “고립이란 명분 뒤에서 늘 추잡한 연루를 꿈꾸어온 나”(77쪽)에 대한 자기반성이 곁들여진다.

올해 이상문학상 후보에 오른 <약콩이 끓는 동안>의 주인공은 사고를 당해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노 교수의 집으로 연락조교 노릇을 하러 다니는 여자 대학원생이다. 조교라고는 해도 별 할 일은 없는데, 반신불수가 된 노 교수는 사소한 일에도 걸핏하면 화를 내고 그의 한심한 아들들은 주인공에게 허튼 농담을 건네곤 한다. 소설 말미에서 주인공은 그 자신 교통사고를 당해 노 교수와 마찬가지로 반신불수의 처지가 되고 마는데, 그렇다고 해서 소설의 기조와 결말이 마냥 어두운 것은 아니다. 작가는 노 교수 집 가정부 순천댁의 눙치는 듯한 말투, 그리고 약콩을 삶는 과정의 비유를 통해 삶의 신산과 고초를 넘어설 위안과 지혜를 모색한다: “살아오며 맺히고 응어리져 약콩처럼 딴딴해졌던 마음 고갱이가 다 물러터지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으리라.”(116쪽)

늦깎이 여자 전문대생 ‘로라’를 주인공 삼은 <가을이 오면>의 태도는 <약콩이 끓는 동안>과 다르다. 알레르기에 시달리는 스물일곱 살의 못생긴 고학생 ‘로라’는 모처럼 생긴 남자친구를 어머니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의 폭발을 일으켜 상황을 망쳐 놓는다. 방어와 자학의 결합이다: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 내부를 불지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지옥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그지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웠다.”(40쪽)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작가의 말’)고 작가는 적었다.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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