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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한자어 없는 이 빛나는 소설을 보라

등록 2007-07-27 18:37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최재봉의 문학풍경

통일운동가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씨가 자신이 쓴 소설 원고를 보내 왔다. 제목은 ‘따끔한 한 모금’. 원고지 750장 분량이다. ‘따끔한 한 모금’은 그가 지난해 12월 서울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말림’ 방식으로 발표했던 이야기를 글로 옮긴 것이다. ‘말림’이란 이야기를 하되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몸짓과 눈물과 아우성과 노래로­한마디로 온몸으로 빚는 것을 가리킨다.

‘따끔한 한 모금’은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고어진의 한살매(일생)를 다룬다. 어려서 집을 나와 고학으로 대학에 들어간 그는 ‘바닥을 캐는 동아리’라는 서클에 가입했다가 끌려가 고문을 받고 옥살이를 하는가 하면, 착한 마음으로 남을 도와주려다가 번번이 배신을 당하고 다시 투옥되는 등으로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몸과 마음이 두루 망가진 끝에 눈밭에 쓰러져 생을 마감한다. ‘어진이’로 시작해 ‘고넝감’으로 마치는 그의 한살매는 우리 현대사의 모순과 극악한 사회상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제목은 죽음을 앞둔 그가 마지막으로 마시는 한 잔의 술을 가리킨다.

큰배내기(대학생) 어진이가 가입했던 동아리 이름은 그의 필생의 화두를 요약해서 말해준다. 소작농 부모가 죽도록 일을 해서 거둔 낟알들이 왜 지주에게 돌아가야 하는지, 밀린 품삯을 받고자 농성하던 일꾼들이 왜 빨갱이로 몰려야 하는지, 왜 언제나 옳은 것이 지고 그른 것이 이기는지 그 바닥을 캐고자 한 것이 고어진의 한살매였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 그런 주제에 못지않게 관심을 끄는 것이 형식과 언어다. ‘말림’을 글로 옮긴 것이니만치 ‘따끔한 한 모금’은 입말투의 가락과 흥이 살아 있다. 박상륭 소설의 남도풍 가락에 견주어 이를 서북투라 해도 좋겠다. 이런 식이다.

“삼태기 눈이란 무엇일까. 딴 거이 아니다. 산다는 것이 어렵고 그렇게도 지겨워 마침내 삶의 뜻마저 저버렸던 불쌍하게 못난 이들까지도 눈에 덮여 죽을 순 없다는 배짱, 한바탕 똥배짱을 불러일으키는 한소리 불림, 주어진 판은 깨고 새로운 판을 일구는 한소리 불림이라고 했으니 아, 우리에게 삼태기 눈이란 무엇일까. 그대로가 줄줄이 살아가는 이야기인 셈이다.”

‘따끔한 한 모금’이 외래어는 물론 한자어도 없애고 순우리말로만 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구나 놀랍다. 한문이 쓰인 것은 주인공과 몇몇 인물들의 성씨, 백 천 만 억 같은 숫자, 그리고 지명인 해남뿐이다. 소설에서 쓰인 순우리말은 예로부터 내려오던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은이가 만들어 쓴 말들이 더 많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첫물배움집, 두물배움집, 세물배움집으로 한 것을 비롯해 눌데(방), 들락(문), 땅별(지구), 막심(폭력), 배내기(학생), 빈흘(공기), 뻔뻔치(파렴치범), 새뜸(소식), 얼른짝(유리창), 집치기(가택침입), 흘떼(강물)처럼 당장 써먹고 싶도록 탐스러운 말들이 수두룩하다. 그이는 기왕에 낸 책들에서도 고집스러울 정도로 우리말을 살려 써 버릇해 왔다. 달동네, 동아리, 모꼬지, 새내기 같은 말들은 그가 ‘저작권’을 주장하는 신조어들이다.


“‘재떨이’는 500년, ‘돋보기’는 200년 밖에 안 된 말들이야. 얼마나 듣기 좋아. 지금도 얼마든지 우리말을 맹글어 쓸 수 있어요. 이번 이야기 꾸림(=소설)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살아 있는 동안은 우리말을 살려 쓰고 빚어낼 생각이야.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말이야.”

우리말에 대한 그이의 애정 어린 고백을 들으며 시인, 작가 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이 사람을 보라!’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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