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 문학전문기자
최재봉의 문학풍경
80년대 문학을 지배했던 현실주의의 확고한 원칙 가운데 하나는 ‘지금 여기’의 정신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 그리고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이 땅의 현실에 문학은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영어로 풀자면 ‘now & here’가 될 것이다. 이 말을 가지고 말장난을 한번 해 보자.
우선, ‘now & here’의 가운데 접속사를 지우고 now와 here를 붙여 본다. ‘nowhere’가 된다. 한글로 쓰자면 띄어쓰기를 무시한 형태 ‘지금여기’쯤이 되겠다. 그런데 nowhere를 파자(破字)해서 no와 where의 결합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 ‘no where’, 그러니까 ‘어디에도 없는 곳’이 된다. ‘지금 여기’가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유명한 어휘가 있다. 유토피아(utopia)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등식(?)이 성립한다. ‘지금 여기’ = ‘어디에도 없는 곳’ = ‘유토피아’. 다시 말해서 ‘지금 여기’야말로 ‘유토피아’라는 얘기가 된다.
이런 말장난이 문학과는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즈음 한국 소설이 어쩐지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하는 말이다. 한국 소설은 한편에서는 역사물을 향해 거슬러오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경 바깥으로 내달려가고 있어 보인다. 〈남한산성〉과 〈리진〉, 〈천년의 왕국〉과 〈논개〉 등 최근 출간된 한국 소설들이 약속이나 한 듯 역사에서 소재를 택한 것들이라는 사실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물론 역사란 현재를 비춰볼 거울로서 훌륭하게 구실할 수 있다. 요즘 나오고 있는 역사 소재 소설들 역시 어디까지나 현실에 대한 간접적인 관찰과 발언을 표방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독자들의 직접적인 실감은 아무래도 덜하게 마련이다.
국경을 넘어가는 소설들은 어떨까. 최근 문단의 화두가 ‘경계 넘기’일 정도로 월경(越境)의 소설들은 또 다른 대세를 이루고 있다. 언필칭 세계화 시대. 지구촌 어느 구석인들 한국인의 족적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그들’의 삶이 ‘우리네’의 삶과 완전히 무관한 자리에서 꾸려지는 것도 아니다. 국경 바깥을 탐색하는 소설들 역시 ‘지금 이곳’의 문제에 대한 답을 조금 먼 곳에서 찾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치 건너 두 치’라는 속설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진다’는 서양 속담은 또 어떤가. 물리적 거리가 정신적 느슨함을 수반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이쯤에서 작고한 구상 시인의 짧은 시 〈꽃자리〉를 음미해 보자.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꽃자리〉 전문)
부질없을 부연설명 대신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 봐라”는 유명한 말을 다시 소개하고 싶다. 이솝우화 중 ‘허풍선이 여행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로도스라는 섬에 갔더니 자신이 놀라운 뜀뛰기 능력을 발휘하더라며 ‘뻥’을 치는 여행자에게 누군가가 야유조로, 또는 시비조로 건넨 말이다. 점잖게 말하자면 ‘검증 요구’다. 시인의 단아한 시와 이솝우화의 얄미운 검증 요구가 공통적으로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때 그곳’이 아닌 ‘지금 여기’야말로 한국 소설의 꽃자리이자 로도스 섬, 유토피아라는 뜻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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