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
유진오의 신경, 이효석의 하얼빈, 그리고 이태준의 만보산. 여름휴가는 근대문학의 세 거두가 만주 곳곳에 남긴 발자취를 좇는 데 바쳐졌다. 민족문학연구소(소장 김재용)가 조직한 만주 문학기행에 동행한 것이다. 이 연구소는 지난해 <일제 말기 문인들의 만주 체험>이라는 자료집 성격의 단행본을 낸 바 있다. 세 사람의 단편소설을 비롯해 이기영·유치진·정인택·장혁주 등의 소설과 기행문, 르포, 희곡 등을 모아 엮은 책이다.
“저쪽 하늘 끝에서 이쪽 하늘 끝까지 철수의 시야를 가리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도 둥글고 지평선도 둥글다. (…) 항용 쓰는 넓다는 형용만 가지고는 도저히 이 북만주 유월의 평야를 표현할 수는 없으리만치 참말로 그것은 넓고 클 따름이다.”
정인택의 소설 <검은 흙과 흰 얼굴>(1942)의 한 대목은 만주 벌판을 처음 본 조선인들이 공통적으로 받는 첫인상을 요약해 준다. 제 이름으로 된 땅 한 뙈기 갖기가 소원이던 조선 농민들이 광활한 만주 벌판을 대하고 얼마나 흥분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아직도 건설 도중이라는 느낌은 있었으나 갓 나온 연녹색 버들 사이로 깨끗한 콘크리트의 주택들이 깔리고, 멀리 보이는 큰 건축물들의 동양적인 지붕도 눈에 새로웠다. 이 건축의 새로운 양식도 동양이 서양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자기의 것을 창조하려는 노력의 한 나타남일까 하고 철은 생각하였다.”
유진오의 단편 <신경>(1942)에서 만주국 수도 신경(지금의 창춘)에 도착한 작가 겸 교사 ‘철’은 일제가 조성한 신도시의 건축물들이 표상하는 ‘동양적 근대’에 대한 매혹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오늘날도 창춘 중심가에 남아 있는 ‘8대부’(만주국의 8개 주요 부처) 건물들은 서양 스타일의 본체에 동양 식 기와지붕을 얹은 독특한 모양새로 눈길을 끈다.
“나는 키타이스카야 거리를 사랑한다. 사랑하므로 마음에 근심이 솟는 것일까. (…) 낡고 그윽한 것이 점점 허덕거리며 물러서는 뒷자리에 새것이 요란스럽게 밀려드는 꼴이 손에 잡을 듯이 알려진다. 이 위대한 교대의 인상으로 말미암아 하얼빈의 애수는 겹겹으로 서러워 가는 것이다.”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는 하얼빈의 유서 깊은 호텔 ‘모데른’의 삼층 객실 창 너머로 키타이스카야(현재의 중앙대가) 거리를 내려다보는 ‘나’는 이효석 소설 <하얼빈>의 주인공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토속 서정과는 거의 정반대되는 자리에서 낭만주의적 이국취향을 과시하는 이 작품을 유진오의 <신경>과 마주 세워 보면 어떨까. <신경>의 유진오가 감탄하며 바라보는 일본발 변화를 이효석은 애수에 잠겨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이태준의 <농군>(1939)은 1931년에 벌어진 만보산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만주인들의 밭을 논으로 개간하고자 물길을 내려는 조선 농민들과 이를 막으려는 현지인들의 충돌이 확산되어 조선 내에서도 중국인들에 대한 집단 습격이 벌어졌던 사건이다. 어렵게 찾은 그 무대에서 유일한 조선족 서영산(60)씨를 만난 일은 행운이었다. “그때 만들어 놓은 논에서 지금도 벼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한족들도 밭농사보다는 수입이 좋은 논농사를 선호하죠.” 그가 안내한 현장에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물길을 끌어 왔던 조선인들의 땀과 눈물이 푸릇한 벼포기가 되어 출렁이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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