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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국경을 넘는다는 것

등록 2008-08-22 19:31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

속초를 향해 가는 버스 안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탈리아의 한국문학 번역가인 빈센차 두르소 교수였다. 학술 심포지엄 참가차 방한해 백담사 만해마을에 머물고 있노라고 했다. 내가 탄 버스가 곧 만해마을 앞을 지날 참이었지만, 차를 세우고 내릴 수는 없었다. 속초항에서 러시아 자루비노행 동춘 페리호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최종 목적지는 용정의 윤동주 생가와 묘소.

속초에서 자루비노를 거친 다음 훈춘을 통해 중국에 입국하는 코스는 ‘따이공’이라 불리는 보따리장수들이 애용하는 노선이다. 천운영의 소설 <잘 가라 서커스>의 주인공들이 오고 갔던 바로 그 코스. 14일 오후 속초항을 출항한 배는 잔잔한 바다 위를 열여섯 시간 동안 미끄러져서는 이튿날 아침 자루비노에 입항한다.

속초 항로가 열리기 전에는 단지 한적하고 외진 어촌이었던 듯 자루비노에는 이렇다 할 시설물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국경은 어디까지나 국경이라는 듯, 러시아 입국 심사는 뜻밖에도 까다로웠다. 대부분의 승객이 러시아 영토는 다만 경유하기만 할 뿐 결국 중국으로 들어가는 이들인데도 한 사람당 평균 3~5분 정도는 시간을 끌고서야 비로소 스탬프를 찍어 준다.

이렇게 까탈스러운 러시아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낡고 해진 여권을 새 여권으로 바꾸어야 한댔다. 여행사 담당자의 말이었다. 새 여권을 만드는 건 좋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동안 지문 찍기 싫어서 보류하고 있었던 주민등록증을 새삼 발급받아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일상의 크고 작은 불편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주민등록증 발급을 미뤄 왔던 지난 몇 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주민센터로 이름이 바뀐 동사무소에 가서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먹물을 묻히고 지문을 찍히던 순간, 흡사 동정을 잃은 사춘기 소년처럼 허탈함과 후련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런 내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루비노 여객터미널을 빠져나간 뒤에도 진행은 순조롭지 않았다. 중국 땅 훈춘으로 건너가기 전, 두 군데의 국경 검문소 앞에서 버스는 하염없이 대기했다. 어쩌면 평생을 국경 검문소 앞 버스 안에서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자루비노에서 훈춘까지 차로 겨우 30분 정도 거리를 통과하는 데 대여섯 시간은 족히 걸린 듯하다.

덕분에 광복절인 15일 윤동주 생가에서 예정되었던 문학행사는 파행을 겪었다. 윤동주가 헤던 별이 내리 비추는 밤의 생가 마당에서 명동촌 주민들과 어울려 음식과 술을 나누고 여흥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백두산을 다녀온 뒤인 17일 오후 윤동주의 묘와 생가를 다시 찾아 첫날 못다 했던 행사를 마저 진행했다. 행사에는 일본인 독자도 참가해 윤동주의 시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읽었다. 사실 한동안 망실되었던 윤동주의 묘를 찾아낸 이도 일본의 한국문학 연구자인 오무라 마쓰오 교수였다.


훈춘에서 자루비노를 거쳐 돌아오는 길은 한결 순조로웠다. 귀국한 뒤 두르소 교수와 연락을 취해 만났다. 고은 시인의 시를 번역하고 있는 그는 소속 대학(베네치아 카 포스카리대)에서 정교수 발령을 받은데다 원어민 강사 티오까지 확보했다는 낭보를 전해 주었다. 번역을 통해 언어의 국경을 넘고 있는 그에게 축하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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