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사서삼경의 하나인 <서경>(書經)은 정치학의 고전이다. 난삽한 언어의 숲을 헤치고 들어가면, 이 책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정치의 원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이 책의 몇 구절을 같이 읽어보자.
<서경>의 정치학에는 법이 포함된다. 동아시아 법학의 기원 역시 <서경>에 닿아 있는 것이다. 먼저 이 책의 첫머리에 해당하는 ‘순전’(舜典)의 한 부분을 들추어본다. “생재(眚災)는 풀어주고, 호종(怙終)은 사형에 처하라.”(眚災肆赦, 怙終賊刑) ‘생재’는 실수로 저지른 죄를 말한다. 살다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뜻하지 않게 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처벌하지 말거나 가볍게 처벌하고 풀어주란 말이다. ‘호종’의 ‘호’는 믿는다는 뜻으로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경우다. ‘종’은 ‘다시 범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호종은 권력이나 돈을 믿고 의도적으로 죄를 거듭 범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 경우 돌아보지도 말고 사형에 처하라는 것이다.
‘순전’의 법정신은 ‘대우모’(大禹謨)에 와서 좀 더 상세해진다. 예컨대 다음 문장! “벌은 자식에게 미치지 않고, 상(賞)은 자손 대대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실수로 저지른 죄는 큰 것이라 할지라도 용서해 주고, 고의로 지은 죄는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놓치지 말고 처벌해야 할 것이다. 의심스러운 죄는 가벼운 쪽을 따라 처벌하고, 미심쩍지만 공이 있다고 생각되면 무겁게 보상해야 할 것이다. 죄 없는 사람을 처벌하기보다는 차라리 법을 지키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 번 더 풀어쓰면 이런 뜻이다. 아비의 죄로 인해 자식이 처벌을 받는 연좌제는 없어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했으면, 그 자손들이 대대로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이다. 실수로 저지른 죄는 크다고 할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마땅하고, 고의로 지은 죄는 아무리 작아도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죄가 있는지 없는지 의심스러우면, 가볍게 처벌하는 쪽을 따라야 하고, 공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스러우면 그래도 공이 있는 쪽으로 판단해서 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 부분은 “백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요즘 말과 다름이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특히 사법부의 법관들은 바늘구멍보다 좁다는 시험을 통과하여 법의 전문가가 된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는 그들을 높이 평가해 마지않았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근래 거의 날마다 사법농단에 관한 뉴스를 접하고부터는 생각이 바뀌었다. 법의 정신을 팽개쳐 버리고, 오로지 법조문만 능란하게 주무르는 ‘법 기술자’들의 행각이 아닌가.
끝으로 ‘여형’(呂刑)의 한 구절을 더 읽는다. “옥(獄)을 맡은 사람은 권세를 부리는 자에게만 법을 온전히 집행해야 할 것이 아니라, 부자에게도 꼭 같이 집행해야 할 것이다.” 법은 권력자들에게만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부자들에게도 꼭 같이 집행되어야 한단다. 이 구절에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 없으신가. 매일 쏟아지는 사법농단 뉴스를 보고, 3천년 전에 만들어진 <서경>의 몇몇 구절을 떠올리는 심정이 무한히 착잡하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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