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자주 가는 동네 공원 산책로 한가운데서 젊은 남자 한 명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크게 소리치는 모습을 봤다. 술에 취했나? 시비 걸면 어떡하지? 길을 돌아 피해 갈까? 불안한 마음으로 조금 더 가까이 가보니 뜻밖의 말이 들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라 두어 번을 더 듣고서야 완전한 문장이 귀에 들어왔다. “브라질 말고 포르투갈어 쓰는 나라가 어딘지 알아요?”
남자는 똑같은 문장을 빠르게 규칙적으로 외쳤다. 멀리서 두려워했던 폭력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냥 행인에게 묻고 또 물을 뿐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브라질에서 포르투갈어를 쓴다는 사실조차 생각해본 적 없는 나는 당황한 채 그를 지나쳐 계속 걸었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마치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양 말없이 지나갔다. 그의 목소리에서 조금씩 멀어지다가 문득 짐작했다. 혹시 자폐스펙트럼장애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그리고 며칠 뒤에야 그가 건네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이거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라질 말고 포르투갈어 쓰는 나라가 어딘지 알아요? 나는 알아요!”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 우영우(박은빈)는 자폐스펙트럼장애가 있는 20대 여성이다. 다섯 살까지 말을 못하던 그는 아빠가 억울하게 폭행당하는 순간 소음과 혼돈 속에 갑자기 상해죄에 관한 법 조항을 읊는 것으로 말문을 터뜨린다. 아빠의 법전을 줄줄 외우는 이 “자폐를 가진 천재”는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 졸업하고 대형 로펌에 입사한다.
우영우의 이야기는 문지원 작가의 전작인 영화 <증인>에서 자폐스펙트럼장애가 있고 변호사를 꿈꾸던 고등학생 임지우(김향기)의 인생 다음 장처럼 보인다. 드라마는 자폐스펙트럼장애를 가진 사람의 민감한 감각과 자기만의 규칙, 비장애인 중심적으로 설계된 공간에서 그가 겪는 어려움을 꼼꼼하게 그려내는 한편 우영우가 남과 다르기에 가질 수 있는 관점과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준다. 이 공들여 만든 따뜻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비장애인을 능가할 만큼 특별하게 우수한 능력을 갖춘 장애인이 그렇지 않은 장애인보다 더 자주 대중매체를 통해 재현되고 사랑받는 현실에서 외면할 수 없는 질문이 있다. 나는 과연 우영우보다 사회인지가 부족하고 노동능력이 떨어지며 ‘불편한’ 혹은 ‘귀엽지 않은’ 장애인과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된 비장애인일까. 나는 그런 의지를 얼마나 가진 사람일까.
드라마 속 우영우 주변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가끔 실수하면서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중 로펌 직원 이준호(강태오)는 우영우가 좋아하는 고래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기꺼이 들어주고,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고래 이야기는 점심시간에만 나누자는 규칙을 제안한다.
이준호가 우영우와 소통하는 과정을 보며 나는 다시 산책로의 남자를 떠올렸다. 그가 던졌던 질문은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요청, 나와 함께 이야기 나누자는 제안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제 브라질 말고 포르투갈어 쓰는 나라의 이름을 몇 개 안다. 우선 포르투갈, 그리고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이다. 언젠가 산책로에서 또 그와 마주친다면 대답해주고 싶다. 끝없이 고래 이야기를 쏟아내는 우영우처럼 그가 포르투갈어에 대해 너무 방대한 지식을 알려주려 한다면 조금 곤란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대화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무엇도 알 수 없을 테니까.
최지은 자유기고가
*최지은의 ‘노 땡큐!’ 연재를 이번호로 마칩니다. 그간 수고해주신 필자와 사랑해주신 독자께 감사합니다. 최지은씨는 “‘노 땡큐!’ 덕분에 좀더 생각하며 살 수 있었다”고 전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