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서울출판예비학교 첫 수료식을 가다
6월 30일. 한해의 반이 뚝 부러지던 날. 마포구 서교동의 출판인회의 회관에서 배코머리, 꽁지머리, 노랑머리가 나타났다. 이날은 다름아닌 서울출판예비학교 1기 수료식이 열리는 날. 배코머리는 이 학교 교감인 박영률(커뮤니케이션북스 대표, 출판인회의 교육위원장)씨, 2팀 담임교수 김철호(유토피아 대표)씨, 3팀 학생 주소림씨.
1월 초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한 테이블에 앉았던 이들은 6개월 교육을 마치는 날 각각 그러한 머리를 하기로 약속했다. 그렇지 않으면 출판계를 영원히 떠나겠다고. 술김의 약속이라고 했지만 각자의 착잡한 심정의 발로였다.
서울출판예비학교는 노동부가 추진하는 신규 직업인력 양성 훈련 프로그램인 ‘중소기업직업훈련컨소시엄’ 제도의 일환. ‘중소기업직업훈련컨소시엄’은 중소기업들이 직업훈련을 실시할 경우 기업에서 납부한 고용보험료에 일정 규모의 지원금을 얹어 되돌려주는 제도다. 출판회의로서는 기존의 교수진과 시설을 이용해 편집자를 양성함으로써 당면한 인력난을 해소하고 노동부로서는 비용을 분담하여 골칫거리인 청소년 실업율을 낮추는데 기여할 수 있어 서로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출판인회의(회장 김혜경)에서도 처음 시작하는 제도인 만큼 공을 많이 들인 편. 지난해 5월 176개사로 컨소시엄을 꾸렸고 11월에는 출판사의 인력 및 교육 수요를 조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교육콘텐츠를 개발하고 교수진을 꾸리고 훈련생 29명을 뽑아 입학식을 열기까지 10개월이 소요됐다.
훈련생 선발도 까다로워 서류심사, 한국어 및 논술시험과 면접을 거쳐 지원자 120명 가운데 29명을 선발했다(3명 중도탈락). 4대1 경쟁률. 뽑힌 사람들은 스물넷에서 서른다섯의 청년백수들. 면접 과정에서 편집에 대한 의욕과 열정이 확인된 이들에게 없는 것은 기능뿐(가장 중요한).
현장의 교수진이나 백수였던 학생들이나 여섯 달 725시간의 출판편집 교육은 생소한 만큼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배코, 꽁지, 노랑머리는 세명이었지만 모든 교수와 학생들의 다짐이자 함께 힘 내자는 깃발이었다.
배코·꽁지·노랑머리의 약속
이날 수료식에 앞서 6개월 소회를 주고받던 4층 간담회장. 노랗게 머리를 염색한 주소림씨가 뒤늦게 들어서자 ‘와’ 하는 탄성이 나왔다. 간담회를 주관하던 고경대 교수는 바로 박영률 교감한테 확인전화를 걸었다. 이발소에 있다는 대답에 또 한차례 탄성이 흘러나왔다. 6개월 725시간. 고난의 행군을 마친 26명 가운데 17명은 취업이 확정되고 나머지도 면접을 앞둔 마당, 행군을 무사히 마쳤다는 성취감과 교육 결과에 대한 만족감을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훈련은 주5일 하루 6교시 수업. 강의와 세미나 중심의 이론교육과 팀 워크숍을 중심으로 한 도제식 교육. 5~6명을 한 팀으로 모두 5개팀으로 나눠 담임교수가 지정되고, 이들은 교육생이 출판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과 출판 제작과정 전반, 즉 원고검토, 편집·조판, 교열·교정, 레이아웃, 디자인, 마케팅 기법 등을 전수했다.
현장 경험자가 교수가 되어 실제로 책을 직접 만들어가면서 교육하기로는 이번이 처음. 기왕의 대학교육이 장기간에 걸쳐 널널하고 이론에 치우친 반면 예비학교의 수업은 짧은 기간, 실습 위주로 편성돼 일정은 퍽이나 빠듯했다.
학생들은 아침 9시 수업을 위해 아침마다 일찍 ‘등교’하는 것이 괴로웠다고 말했다. 또 교수들은 6개월동안 수업 외에 다른 일을 전혀 할 수 없었다. 특별히 시간을 낸 강무성(도서출판 느린걸음 대표), 김철호 교수는 방치한 일인 출판사 일에 묻혀야 하고 김장환(푸른숲 주간), 최병헌(커뮤니케이션북스 주간) 교수 역시 수료식 뒤 바로 출판현장으로 복귀할 예정이다.
팀별로 실습을 하면서 낸 첫번째 책은 <난세를 가로 지르다> <마음 떠나 길을 걷다> <독일인 유대인 비극의 이중주> <한국인은 신들렸다> <임서방 물건은 돈독도 하지> 등 다섯 권. 원고는 출판사에서 지원받은 것으로 에세이·전문서적, 국내저술·번역물 등 다양하다. 이들은 주어진 원고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사실과 부합하는지를 따져보았고, 주제에 맞춰 체제를 뜯어고치는 것은 물론 의미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원고의 반 이상을 덜어내기도 했다. 각각 50권씩 제본해 교육자료로 남기고 일부는 그들의 기념품으로 삼았다.
두번째 책은 <서양 문명의 창, 기독교>(로즈마리 헤일 지음, 장석만 옮김)는 실제 출간해 시중에 판매한다. 학생들은 원문과 일일이 대조해 오역과 어색한 번역을 잡아냈다. 예컨대 원저에서 잘못 표기된 테르툴리아누스의 생존시기를 바로잡고, ‘캘린더’라고 원어 그대로 옮긴 것을 ‘교회력’으로 표기를 바꿨다. 또 원서에 없는 보론(한국의 기독교)과 용어해설도 붙였다. 판형도 시리즈에 맞게 손 안에 드는 크기로 하고, 표지 역시 고급스럽게 만들었다. 자신의 출판사 유토피아에서 책을 내기로 한 김철호 교수는 여럿이 꼼꼼하게 작업을 해 상업적으로도 손색이 없어 시중판매 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권말에는 서지사항과 별도로 이 작업에 참여한 훈련생 26명, 지도교수의 7명의 이름이 ‘자랑스럽게’ 인쇄돼 있다.
전원이 만든 책 1권은 시중판매
6개월 과정을 무사히 끝내면 머리 모양을 바꾸겠노라는 ‘서교동 결의’를 한 세사람. 왼쪽부터 박영률, 주소림, 김철호씨.
“시간이 무서워요. 긴가민가 시작했는데, 이제는 벽보나 간판에서 자연스럽게 띄어쓰기 잘못이나 오자가 눈에 들어와요. 친구와 대화하면서도 그들의 말을 교정보고 있더라니까요.” “디자이너와 편집자 사이의 의사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알아서 했겠지 하고 서로 믿다 보니 결국 틀리더라구요.” “긴장의 끈을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에요. 잠시 방심하거나 괜찮다 괜찮다 하다보면 잘못 나오더군요.” “편집기획이 가장 중요한 줄 알았는데, 사소한 문자나 색상교정이 책의 품위를 좌우해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게 없더라구요.” “저자에 대한 환상 깨졌어요. 원고가 손볼 데가 많구나 하면서 편집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한마디씩 털어놓는 소감에 반년 동안의 고민이 담겼다. “몇년 늙은 느낌이에요.” 이말에는 와르르 떼웃음이 터졌다. “2년경력에 필적할 만큼 집약적으로 교육을 시켰지만 막상 현장에 가면 새내기일 수밖에 없어요. 다만 이들이 출판의 모든 과정을 해보았기 때문에 완전초보들이 3년에 걸쳐 습득할 것을 1년 안에 배울 것이라고 봐요. 자신의 분야를 빨리 찾아 정착할 수 있고 그만큼 성장이 빠를 것입니다.” 김장환 교수의 말이다.
고경대 교수는 “386세대 이후 맥이 끊긴 출판인력 유입의 맥을 잇게 되었다”면서 “교사들이 멘토 역할을 해 문제가 생기면 조정을 하는 등 일종의 애프터서비스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력 못잖은 새내기 17명 취업
176개 출판사가 컨소시엄으로 만든 서울출판예비학교 1기 수료생들과 교수들. 도제식 교육으로 ‘2년 경력자’를 양성·공급한다는 ‘편집자 자급자족’ 실험. 경력 위주의 출판계 인력채용 관행이 바뀔 것인가. 출판인회의 제공
이들에게 거는 출판계의 기대는 자못 크다. 새내기를 뽑아 가르쳐 일좀 한다 싶으면 다른 출판사로 옮겨가고, 경력자들 역시 1~2년마다 출판사를 떠돌아 ‘그나물에 그밥’인 현실에서 새로운 피에 대한 기대는 클 수밖에 없다.
수료생 가운데 한명을 채용한 들녘출판사 윤재인 주간은 “인턴사원을 뽑은 적이 있었는데, 아무 것도 모르고 가르칠 시간이 없어 허드렛일만 하다가 그만 둔 적이 있다”면서 “이번에 뽑은 친구는 집중교육을 받은 만큼 일년동안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게 해 적정한 분야에 정착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번 실험이 출판계의 고질적인 인력수급 문제를 푸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결과가 좋으면 매년 한두 명을 이런 식으로 선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예술작품에 숨겨진 수학> 같은 매니아가 찾는 책을 만들고 싶어요.”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사>처럼 의미있는 책이 좋아요.” “할말은 많은데 알려지지 않아 소외된 저자를 발굴하고 싶어요.”
수료생들의 의욕이 큰지 출판계의 기대가 큰지 곧 판가름 날 터.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맞춰가는 과정이다. 고통스러울지라도 함께 져야 할 짐이기 때문이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