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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지닌 책 잘 벼려 이젠 쓰려고요”

등록 2006-08-17 20:32수정 2006-08-18 14:27

호구지책이 있고, 독서지책이 있어 그한테는 더 이상의 바람이 없다.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그동안 모아온 자료를 정리하는 일. 올 가을부터는 개화기 복식부기의 이입사를 꿰어볼 생각이다. 한해 한가지씩이면 기억이 쇠잔하기 전까지 웬만한 것은 가능할 터이다.
호구지책이 있고, 독서지책이 있어 그한테는 더 이상의 바람이 없다.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그동안 모아온 자료를 정리하는 일. 올 가을부터는 개화기 복식부기의 이입사를 꿰어볼 생각이다. 한해 한가지씩이면 기억이 쇠잔하기 전까지 웬만한 것은 가능할 터이다.
70대에도 책쓴 토마스 만 거울 삼는 노신사
옷차림·집분위기만큼 2만권 장서 가지런
“영화 2천편 봤지만 ‘돈키호테’ 한편만 못해”
5년전 실명위기 뒤 집필 신념…“가을에 착수”
“부기”와 ‘연애’ 소재로 개화기 조망할 터”

한국의 책쟁이들/⑦ ‘삼성비서실’ 저자 박세록씨

경기도 고양시 가장동 그의 집은 완벽하다. 2만권 장서. 거실, 안방, 주방옆방, 서고, 서재 등 다섯 곳에 펼쳐진 책들은 분야, 시리즈, 책 크기대로 정리정돈돼 있다. 바닥에 놓인 책이 없다. 단 한 곳 예외, 주방옆방 구석에 몇 권. 더도말고 덜도말고 책꽂이와 책의 양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셈.

박세록(70)씨.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작고)의 비서를 지냈다. 그 인연으로 <삼성비서실>(미네르바기획, 1997)을 쓰고 펴냈다. 그룹 안에서 삼성전자, 제일기획 등 주로 창업선발대로 활약했다. 이쯤이면 아하! ‘삼성맨’이다. 그 가운데서도 고갱이. 옷차림 역시 흐트러짐 없다. 8월 초순 무더위에도 연노랑 세미 정장이다. 그래서다. 거실 책꽂이 위에 앉은 고운 먼지가 슬픈 것은…. 일주일쯤 된 느낌.

“요즘 <일리아드 오디세이> <겐지 모노가타리>를 읽었어요. 일리아드는 50년만입니다. 감각을 벼리기 위해서죠.”

“토마스 만이 일흔한 살에 <선택된 인간>을 썼고 윈스턴 처칠 역시 일흔 넘어 많은 저술을 남겼다”는 말은 그 사람들이 그의 거울이라는 의미다.

<부기 도입사>, <이병철 평전>, <연애 문화사>, <미인의 역사>, <이름 문화사>. 이 책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박씨가 쓰려는, 앞으로 나올 예정인 까닭이다. “죽기 전에 정리해야죠. 가을부터 착수할 겁니다.”

거실 책꽂이에는 메모로 가득한 바인더 노트가 16권. 노트의 등에는 사무관리, 비서론, 산(경기, 강원충청, 영호남), 명승지, 성, 바다, 일기, 연구경영, 연구등산, 회계, 연애, 미인, 실크로드, 집시, 탱고 등 제목이 달려있고 권마다 다닥다닥 견출지에는 세부사항이 구별돼 있다. 그 가운데 ‘연애’를 들춰보니 “남성은 권총자살 여성은 투신자살(보봐르, <제2의 성> 31쪽). 윤심덕의 자살방법은 여성적인 방법이다”라는 메모가 눈에 띈다.


그가 가장 관심을 두는 분야는 개화기. “1890년대 서구문화의 유입은 4~5세기 불교의 도래보다 더 큰 변화입니다.” 한국사를 근본부터 뒤흔든, 역사상의 일대 장관이라는 거다. 쓰려고 하는 부기, 연애 분야에서 그 파노라마를 보여줄 수 있다고 본다. 70년대 초부터 심혈로 모아온 자료는 그쪽이 가장 많다.

부기는 자본주의의 바탕에서 그 시스템을 움직여 왔으면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부문. 아무래도 다루기 어렵고 전문적이기 때문이다.

70년대초부터 심혈로 자료 모아

서양 부기가 처음 들어오기는 19세기 말 천일은행(상업은행 전신)을 통해서라고 추정된다. 부기 단행본이 첫선을 보인 것은 1908년(융희2년). <신편 은행부기법>(임경재, 휘문관), <실용 가계부기>(민천식, 휘문관), <실용 상업부기>(임경재, 휘문관)가 그것. 일본 것을 그대로 들여와 편역했다. 이어서 나온 것이 1908년 <사개송도치부법>(현병주, 덕흥서림). 송도 상인들의 용어를 빌어와 복식부기를 설명하고 있다.

부기를 국내에 정착시킨 사람으로 윤정하를 꼽는다. 한국의 첫 회계사(당시 명칭 계리사)다. 1938년에 낸 <조선세무요람>이 그의 저서. 학문적으로 정착시킨 이는 김순식(메이지대 상업부 졸업, 고려대 교수 역임). <상업부기요람>(엄송당서점, 1937)을 냈고 해방 뒤 <부기요강>(동지사, 1948)을 썼다.

“개성(송도)부기는 복식부기가 아닙니다.” 그의 어투는 단호했다. 개성부기가 복식부기라는 오류를 빚어낸 장본인으로 현병주와 윤근호를 꼽았다. 1908년 현병주가 서양 복식부기를 부연하면서 송도치부법의 용어를 차용한 것이 빌미가 되었고 1984년 윤근호가 <한국회계사 연구>(한국연구원)에서 ‘용어의 차용’을 ‘사실의 부합’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증거로 <장책>을 제시했다. 80년대 청계천 경안서림에서 구입한 이 장부는 어느 개성상인이 작성한 1887~89년 3년치 외상장부. 여기에는 복식부기의 기본이 되는 단위의 통일이 구현돼 있지 않다. 물량은 물량대로, 화폐는 화폐대로, 따로 기술돼 있어 아퀴를 맞출 수 없다. “단위가 일관되지 않으면 장부의 객관성이 없거든요. 1원 단위까지 정확히 맞출 수 있어야 하는데 송도치부법은 그렇지 않아요.”

이러한 학문적 오류는 실제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되지 않는 탓이다. 80년대 이전까지는 장책 자료가 많이 유통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무렵 민족주의 사관이 득세하면서 국수주의로 흐른 영향도 없지 않다고 본다.

‘연애’ 역시 개화기를 엿보는 만화경이다. <매천야록>에 처음으로 일본인들의 ‘키스’가 언급돼 있다. 이광수의 글을 보면 그가 하라다 미노루의 연애 관련 글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하라다는 1920년 엔런 케이의 <연애와 결혼>을 번역 출간했다. 박씨는 ‘연애’를 통해 한국의 여성운동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해탄에서 김우진과 정사한 윤심덕, <김연실전>의 이연실,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 등이 대상일 터. “한국의 여성운동이 5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선진국 수준에 이른 것은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안방의 한쪽 벽을 차지하는 철학 서적 역시 문화 이입사의 전모를 보여줄 수 있는 컬렉션이다. 1950년 이전에 나온 것들은 대부분 모았다. 능력과 필요를 갖춘 사람이면 넘길 생각도 있다. 거의 완벽하게 모았던 임진왜란 관련 책은 더 절실한 친구의 아들한테 양도한 바 있다.

감식안 무뎌져 이젠 필요 책만 사

돋보기를 쓰는 그는 책을 볼 때 별도의 커다란 돋보기를 집어든다. 6년쯤 전부터다.

2001년 그는 넉달동안 사실상 장님으로 지낸 적이 있다. 왼쪽 눈이 포도막염으로 실명한 터에 오른쪽 눈의 시신경에 마비가 온 것. 충격이었다. 책 수집광에다 영화광인 그한테 눈은 생명줄. 심각한 고민을 했다. 고민이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살아서 무얼 하겠는가. 밤낮이 뒤바뀌고 열흘동안 몸무게가 5㎏이나 빠졌다.

실명해서도 업적을 낸 사람들을 떠올렸다. <임꺽정>의 홍명희, ‘아랑페스 협주곡’의 호아킨 로드리고,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오스트롭스키 등등. 삶의 방식을 비디오 체제에서 오디오 체제로 전환했다. 휴대용 녹음기를 사고 성경테이프 등 각종 오디오북을 샀다. 다행히 사용할 기회는 없었다. 밑져야 본전, 세브란스병원에서 회복확율 20%라는 왼쪽 눈을 수술해 0.2의 시력을 얻었다. 세상을 다시 얻은 기분.

그는 요즘 영화관은 물론 헌책방에 안 간다. 책에 대한 의욕을 잃었을 뿐더러 좋은 책을 찾아내던 동물적 감각을 잃어버린 것. 최소화한 필요를 새책방에서 채운다. 대신 그동안 사들인 책을 진하게 본다. 업데이트된 책은 <젠틀 매드니스>(뜨인돌), <책>(들녘), <유서필지>(돌베개) 등 ‘책에 관한 책’. 책꽂이 틈에 가로뉘어 끼여 있다. 이쯤에서 ‘책꽂이-책의 완벽한 일치’ 수수께끼가 풀린다.

가혹한 줄 알면서 던진 질문. “계획한 책을 과연 쓸 수 있겠는가?” 토마스 만, 윈스턴 처칠은 그래서 언급됐고 감각을 벼리고 있다는 말도 그래서다.

그는 이야기하던 중, 김두한을 괴롭힌 일본인 형사가 미와 경부라는 설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김두한(1918~1972)이 깡패생활을 하던 40년대에 미와는 함경도 경찰국장을 끝으로 경찰을 그만두고 총독부 고문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미와는 1884년생으로 나이차가 서른 넷, 김두한이 20대일대 미와는 환갑노인이었다. 박씨가 이를 일일이 확인해준 책은 <조선공로자명감>(민중시론사, 1935). 20여년 전 인사동에서 10만원에 샀다는 베게만한 책이다. 그리고 부기도입사를 설명하기 위해 1908년에 나온 책들을 20초도 안돼 뽑아왔다. 또 책꽂이를 둘러보던 중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의 책 <국어 및 조선어를 위해>가 제자리에 없음도 금방 알아냈다.

여자 대신 책과 결혼한듯이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 사실의 정확성, 각종 전거의 위치 등을 꿰고 있는 만치 소기의 저술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마침 찾아온 고서연구회 후배 노영식(53)씨는 “보통 사람들은 재미없어 하지만 누군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의 자료를 오랫동안 모아 가치있는 컬렉션으로 만든 분”이라며 “그 자료가 저술로 꼭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이들, 고전을 읽어야 해요. 영화 2000편을 봤지만 <돈키호테> 한편만 못하더군요. 할리우드가 패권을 잡은 이면에는 독서대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에 이사오기 전 그는 세검정에서 책과 함께 20년을 살았다. 책들이 엄청난 무게로 그를 잡고 늘어졌던 것. 그는 미혼이다. 책의 유혹이 여성의 그것보다 강렬했을까. 지긋한 그는 이미 결혼했는지도 모른다. 지긋지긋한 책과.

글·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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