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 / 영산대 교수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허영의 관리’라는 윤리적 과제-발렌티노와 패션철학
최근 세계적인 디자이너 발렌티노 가라바니가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현역 은퇴 이후 “예술로서의 패션 역사를 정리하고 미래의 디자이너 양성기관을 세우고 이끌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술로서의 패션’이란 모순적인 표현이다. ‘예술은 길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술 작품은 영속성을 추구하지만, 패션 또는 유행은 그 자체로 ‘하루살이’ 같은 변화의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패션철학’은 옷의 유행이라는 모순의 세계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보고자 하는 시도가 될 수 있다.
의·식·주 가운데서 다른 동물들로부터 인간을 확연히 구분해 주는 것이 바로 옷이다. 먹지 않는 동물은 없고, 집을 짓는 동물은 많지만, 옷을 만들어 입는 동물은 없다. 진화론적으로 인간과 가깝다는 침팬지도 나뭇가지와 잎으로 잠자리를 만들기는 하지만 옷을 만들어 입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옷은 인간의 본질적 특징이며 ‘인간은 옷을 입는 동물’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이는 곧 옷의 탐구가 인간학의 통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 가운데서도 패션은, ‘옷입기의 현상학’으로서 매우 중요하지만, 학자들 사이에서 깊고 넓게 탐구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패션은 ‘가벼운 영역’이라는 선입견이 ‘무게 있는’ 학자들의 연구를 막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이 허영, 허식, 낭비문화 또는 욕망산업 등의 비난을 받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역을 진지하게 사유한 무게 있는 철학자들도 있다.
이마누엘 칸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인간은 모방 행위가 주는 오락적 재미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을 눈여겨본다. 칸트는 “유·무익성과는 관계없이, 최소한 남들만큼은 자신을 내보이려는 목적을 지닌 모방 법칙이 유행”이라고 정의한다. 칸트에 있어서 모방 행위 이론과 취향 이론은 밀접하다. 취향은 일정한 대상에 대한 개인의 ‘사회적 판단’이며, 취향에 따라 자신을 내보이려는 것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모방으로서의 유행은 개인적 취향의 구체적인 사회적 통로로 작동한다. 바로 이 점에서 칸트는 유행이 사회화 과정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가치를 관찰한다. 그러므로 그는 유행의 허영을 비판하면서도, “굳이 유행을 따르지 않으려는 태도보다는 차라리 유행에 미치는 것이 더 낫다”고 한다.
‘탈(脫)유행적 태도’ 역시 유행을 깊이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패션 마니아’와 마찬가지로 유행의 사회화 과정에 의존한다는 점을 세밀하게 분석한 철학자는 게오르크 지멜이다. 그 역시 모방의 법칙과 유행의 관계를 중요시하는데, “유행은 한편으로 그것이 모방이라는 점에서 사회에 대한 의존 욕구를 충족시킨다. 다시 말해 유행은 개인을 누구나 다 가는 길로 안내한다. 다른 한편 유행은 차별화 욕구를 만족시킨다. 다시 말해 구분하고 변화하고 부각시키려는 경향을 만족시킨다.” 이는 유행의 내용이 변화하면서 현재의 유행은 언제나 어제의 유행과 다른 개별적 특징을 갖게 된다는 사실뿐 아니라, 패션이 사회계층적으로 분화한다는 사실에도 입각한다.
칸트와 지멜의 성찰은 인간의 사회화 과정과 사회심리의 차원에서 유행의 의미를 드러내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패션에 대한 윤리적 사색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패션에 대한 비판이 ‘윤리적 폄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폄하의 핵심은 패션을 전형적인 ‘허영’의 세계로 보는 데에 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윤리는 허영을 항상 부정적인 것으로 다루어왔다. 그것은 ‘필요 이상의 겉치레’이자 ‘분수에 넘치는 외관상의 변화’라고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영은 삶에서 배제될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허영에서 빌 ‘허’(虛)자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허영을 뜻하는 영어 배니티(vanity)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데, 그것은 ‘비어 있음’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비어 있는 것은 가볍다. 그래서 소홀히 취급될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서 지나치게 진지함을 강조하는 삶에서는 그것을 배제할 가능성 또한 높다. 그러나 실로 허영을 삶에서 완전 배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배제하려고 진력하면 할수록 우리 삶은 불균형하게 무거워진다. 통풍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허영에 들뜬 삶을 살라는 말은 아니다. 허영의 배제가 아니라, ‘허영의 관리’라는 전향적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허영이 윤리의 영역으로 들어와 우리의 자의식과 대화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허영은 윤리와 심한 갈등의 상황만을 반복하게 된다. 윤리적으로 폄하되는 것들에 대한 칸트와 지멜의 철학적 성찰 역시 일찍이 이런 전향적 사고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패션 철학은 허영의 세계와 진지한 대화의 창구를 여는 시도인 것이다. 김용석 /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그러나 허영에서 빌 ‘허’(虛)자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허영을 뜻하는 영어 배니티(vanity)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데, 그것은 ‘비어 있음’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비어 있는 것은 가볍다. 그래서 소홀히 취급될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서 지나치게 진지함을 강조하는 삶에서는 그것을 배제할 가능성 또한 높다. 그러나 실로 허영을 삶에서 완전 배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배제하려고 진력하면 할수록 우리 삶은 불균형하게 무거워진다. 통풍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허영에 들뜬 삶을 살라는 말은 아니다. 허영의 배제가 아니라, ‘허영의 관리’라는 전향적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허영이 윤리의 영역으로 들어와 우리의 자의식과 대화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허영은 윤리와 심한 갈등의 상황만을 반복하게 된다. 윤리적으로 폄하되는 것들에 대한 칸트와 지멜의 철학적 성찰 역시 일찍이 이런 전향적 사고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패션 철학은 허영의 세계와 진지한 대화의 창구를 여는 시도인 것이다. 김용석 /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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