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 / 영산대 교수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우드스톡 록 페스티벌
“와우! 여름방학 동안 ‘록(Rock) 콘서트’에 갈 기회가 있다는 건 신나기도 하지만 정말 보람 있는 일이에요. 우드스톡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언뜻 본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한 젊은이가 환한 얼굴로 답하고 있다. 그 청년은 ‘우드스톡’(Woodstock)의 시대에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마치 그 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우드스톡은 록 페스티벌의 전설이다.
1969년 8월 15일부터 미국 뉴욕 주에 있는 우드스툭 근교의 농장 터에서 3박4일 동안 열렸던 록 페스티벌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어떤 사람은 1969년 여름 인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두 사건으로, 인간의 달착륙과 우드스톡 록 페스티벌을 손꼽기도 한다. 문화사적으로도 우드스톡은 대중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어디까지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러면 우드스톡은 이런 역사적 의미를 넘어서 우리에게 어떤 철학적 화두를 던질까? ‘3일 동안의 평화와 음악’이라는 구호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페스티벌은 ‘평화’의 주제를 내걸고 있었다. 물론 당시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어서 반전이 중요한 이슈였고, 흑백 인종차별로 인한 사회적 분열과 갈등에서 받은 깊은 상처의 치유와 평안의 욕구 또한 강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페스티벌의 첫 연주자 리치 헤이븐스가 무대에 등장할 때다. 장내 아나운서는 이렇게 소개한다. “오늘 여러분들은 수많은 노래들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노래들은 모두 같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자 이곳에 오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언젠가 여러분들을 기억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자 헤이븐스가 특유의 기타 연주와 함께 저 두터운 저항의 파열음으로 노래의 첫 마디를 푸른 천공을 향해 쏟아낸다. “프리덤(Freedom)!”
자유! 그렇다, 우드스톡은 평화 속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사람들의 페스티벌이었다. 그것은 감동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평화와 자유는 갈등하지 않고 잘 공존할 수 있을까? 각 개인이 자유를 갈구하는 과정에서 평화는 위협받지 않을까?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는 많이 제한되어야 하지 않을까? 칸트도 “각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인간 공동체의 핵심적인 문제이며, 구체적으로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규율과 조정이라는 이념의 실현이 모든 공동체 건설에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각자의 자유는 서로 부딪치며 공동체의 평화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동체 구성원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유토피아의 상상에서도 규율과 조정의 방식은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우드스톡은 록 페스티발이라는 ‘혼란스런’ 행사 안에서 ‘함께 있음’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한다. 약 40만 명으로 추정되는 인파가 몰린 페스티벌 현장은 순식간에 도시 하나가 새로 형성된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모든 도시에 필요한 통제 수단이 없었다. 행정 공무원도 없고 공안 요원도 없고 경찰도 없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폭우까지 쏟아지는 돌발 사태에도 이 거대한 행사는 큰 사고 없이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유는 있다. 각 개인의 자유가 ‘자율의 실용성’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권력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주최 쪽은 예상외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자 참여자들의 자율적 의식에 호소했다. 물론 록 음악이라는 공통의 관심이 크게 작용했다.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공통의 놀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유가 자율과 함께 할 때 평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우드스탁은 ‘자율적으로 놀이하는 인간들의 모임이 유토피아’임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이런 유토피아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드스톡은 그 후의 록 페스티벌들이 이상으로 삼아야 할 모델이 되었다. 오늘도 록 콘서트나 페스티벌의 미덕은 젊은이들에게 ‘공동체의 이상향’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데에 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3일째 되는 날 아침, 먹을 것도 떨어지고, 전날의 폭우로 온통 진흙탕으로 변한 곳에서 밤을 지새느라 지친 젊은이들에게 인근의 농부들이 음식을 장만해서 가져온다. 그러고는 이렇게 외친다. “여러분들 여긴 천국이에요. 재난이 닥친 곳에 항상 천국이 깃든다는 것 아시죠!” 자유와 평화 그리고 자율적 놀이의 유토피아를 가능하게 했던 사람들에게 ‘작은 천국’이라는 보상이 주어진 것이다.영산대 교수, anemoskim@ysu.ac.kr
하지만 이유는 있다. 각 개인의 자유가 ‘자율의 실용성’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권력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주최 쪽은 예상외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자 참여자들의 자율적 의식에 호소했다. 물론 록 음악이라는 공통의 관심이 크게 작용했다.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공통의 놀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유가 자율과 함께 할 때 평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우드스탁은 ‘자율적으로 놀이하는 인간들의 모임이 유토피아’임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이런 유토피아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드스톡은 그 후의 록 페스티벌들이 이상으로 삼아야 할 모델이 되었다. 오늘도 록 콘서트나 페스티벌의 미덕은 젊은이들에게 ‘공동체의 이상향’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데에 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3일째 되는 날 아침, 먹을 것도 떨어지고, 전날의 폭우로 온통 진흙탕으로 변한 곳에서 밤을 지새느라 지친 젊은이들에게 인근의 농부들이 음식을 장만해서 가져온다. 그러고는 이렇게 외친다. “여러분들 여긴 천국이에요. 재난이 닥친 곳에 항상 천국이 깃든다는 것 아시죠!” 자유와 평화 그리고 자율적 놀이의 유토피아를 가능하게 했던 사람들에게 ‘작은 천국’이라는 보상이 주어진 것이다.영산대 교수, anemoskim@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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