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 / 영산대 교수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디 워〉와 말의 전쟁
〈디 워〉는 에스에프(SF)가 아니다. 심형래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내 입에서 자연스레 나온 말이다. 나는 요즘 속도로 치면 뒤늦게 이 영화를 보러 가면서, ‘흥미로운 에스에프’ 한 편 보겠구나 생각하고 영화관에 들어섰다. 수많은 말과 글들이 이 영화를 ‘에스에프’라고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화관 로비에 진열되어 있는 〈디 워〉의 팸플릿 표지에는 “대한민국 에스에프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라는 문구가 강렬한 이미지로 쓰여 있다.
〈디 워〉가 에스에프가 아니라는 것은 영화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쉬운 예를 들면, 〈디 워〉처럼 거대 파충류들이 등장하는 〈쥬라기 공원〉은 에스에프다. 과학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황당무계하더라도 상상의 세계 안에 내재하는 과학적 가설과 논리를 활용하면 에스에프다. 이런 점에서 〈반지의 제왕〉은 에스에프가 아니고 판타지다. 〈디 워〉 역시 판타지 작품이다. 이무기의 비늘에 대한 설명이 잠깐 나오고 다른 공상과학 영화에서 모방한 영상들이 나오지만 그것은 이무기의 ‘전설’을 현대화하는 과정에서 차용된 것들일 뿐이다.
그렇다고 에스에프가 우월하고 판타지가 열등하다는 건 아니다. 존 로널드 루얼 톨킨은 환상 예술에 대한 시론에서 “판타지는 인간적 권리로 남아 있다”고까지 했다. 그것이 예술에서 소중한 장르임에 틀림없다. 에스에프와 판타지는 서로 섞이기도 하지만, 때론 이런 구분이 필요하다. 영화를 공부하는 청소년들을 위해서도, 이미 전문가가 된 사람들이 앞으로 더 발전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디 워〉에는 확인되지 않은 말들이 너무 많다. 작품 내적으로도 그렇고,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디 워〉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지만(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문화적 현상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잘 알 수 없게 하는 뭔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디 워〉는 영화의 내적 이분 구도가 영화의 외적 이분구조로 격렬하게 이탈한 특이한 사례다. 〈디 워〉는 판타지 작품에서 즐겨 쓰는 선과 악의 구도를 갖고 있다. 영화에서는 악의 이무기가 주로 등장하고 선의 이무기는 잠재하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튀어나오지만, 선과 악의 구도는 전제되어 있다. 거칠게 표현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그 구도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이무기의 이미지처럼 거대하게 구분된 선과 악의 세계는 우리 현실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한 선과 악의 서사는 판타지인 것이다. 우리 일상 현실은 선과 악의 미묘한 접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선보다는 차선이, 악보다는 차악이 중요해지고, 종종 차차선과 차차악들 사이에서 삶은 영위된다. 악에 대한 연민이라는 모순이 있고, 위선에 대한 혐오라는 갈등이 있다. 그래서 현실은 드라마다.
영화 평론은 냉혹한 현실의 지형에서 행해진다. 토론도 냉철한 현실 감각을 바탕으로 한다. 이들이 논쟁으로 발전하면 드라마가 된다. 하지만 이것도 ‘논리적’ 싸움인 이상 판타지는 아니다. 그런데 ‘선과 악의 확연한 구도’를 가진 판타지가 평론과 토론의 현실에 뛰어든다. 그러고는 현실의 사람들을 선과 악으로 철저히 분명하게 구분하기 시작한다. 이런 거친 구분 작업에서 선과 악은 곧잘 적과 동지로 치환된다.
그러면 서로 상대의 존재를 무시하는 언어들이 난무한다. 상대와의 접점에서 미묘함을 보려는 노력은 사라진다. 상대를 말살하고자 하는 잠재의식까지 발동한다. 논쟁을 하는 게 아니라, 전쟁을 하게 된다. 전쟁의 목표는 승리다. 논쟁의 목표는 소통이다. 전쟁을 하는 자는 항상 선과 악을 확연히 구분한다. 전쟁은 선과 악의 판타지를 현실로 치환해서 승리를 쟁취하려는 참혹한 싸움 방식이다. 논쟁은 전쟁을 가장한 놀이다. 놀이의 상대는 서로 선과 악이 아니다. 자기 주장에 과분한 자신감을 부여하는 사람들이 찾는 그런 선과 악은 이 세상에 없다. 전쟁놀이는 재미있지만, 전쟁은 참혹할 뿐이다. 그래서 〈호모 루덴스〉의 작가 하위징아는 불가피한 전쟁도 가능하면 놀이처럼 하는 게 덜 참혹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참담함 앞에서 알고자 하는 의욕은 삭제된다. 느끼고자 하는 의욕도 말살된다. 우리는 판타지를 즐기고 싶다. 판타지가 제시한 이분 구조를 현실로 치환해서 실행하고 싶은 게 아니다. 우리는 〈디 워〉에 대해서 잘 알고 싶다. 그러나 선과 악의 윤리적 판타지를 현실에 직접 끌어들여 가지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김용석 /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그러면 서로 상대의 존재를 무시하는 언어들이 난무한다. 상대와의 접점에서 미묘함을 보려는 노력은 사라진다. 상대를 말살하고자 하는 잠재의식까지 발동한다. 논쟁을 하는 게 아니라, 전쟁을 하게 된다. 전쟁의 목표는 승리다. 논쟁의 목표는 소통이다. 전쟁을 하는 자는 항상 선과 악을 확연히 구분한다. 전쟁은 선과 악의 판타지를 현실로 치환해서 승리를 쟁취하려는 참혹한 싸움 방식이다. 논쟁은 전쟁을 가장한 놀이다. 놀이의 상대는 서로 선과 악이 아니다. 자기 주장에 과분한 자신감을 부여하는 사람들이 찾는 그런 선과 악은 이 세상에 없다. 전쟁놀이는 재미있지만, 전쟁은 참혹할 뿐이다. 그래서 〈호모 루덴스〉의 작가 하위징아는 불가피한 전쟁도 가능하면 놀이처럼 하는 게 덜 참혹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참담함 앞에서 알고자 하는 의욕은 삭제된다. 느끼고자 하는 의욕도 말살된다. 우리는 판타지를 즐기고 싶다. 판타지가 제시한 이분 구조를 현실로 치환해서 실행하고 싶은 게 아니다. 우리는 〈디 워〉에 대해서 잘 알고 싶다. 그러나 선과 악의 윤리적 판타지를 현실에 직접 끌어들여 가지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김용석 /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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