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 / 영산대 교수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오바 쓰구미/오바타 타케시 〈데스노트〉 이야기도 진화론의 법칙을 따르는가 보다. 이야기도 다윈이 주장한 ‘변이’(variation)와 ‘선택’(selection)의 과정에서 진화해 가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오바 쓰구미가 쓰고 오바타 다케시가 그린 만화 〈데스노트〉는 〈알라딘〉 이야기의 돌연변이쯤에 해당된다. 아주 특별한 변종이지만 이야기 구조로 볼 때, 주인공 라이토가 주운 노트는 알라딘이 얻게 된 램프이고, 노트의 사신(死神) 류크는 램프의 정령 지니에 해당된다. 램프는 주인의 소원을 들어주고 노트는 주인이 명하는 것을 실행한다는, 피상적 유사점과 본질적 차이점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굳이 변이와 선택의 진화 이론을 언급하는 것은, 이 작품이 오늘날 대중적으로 대단한 인기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에서다. 생명체의 변이는 자연이라는 환경이 선택하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도 원천적 서사에서 여러 번 변이가 생겨나지만 문화환경이 선택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어쩌면 〈데스노트〉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 환경이 전율할 정도로 특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지 모른다. 왜 그런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열일곱 살의 고교생 야가미 라이토는 어느 날 검은 색 표지의 노트를 하나 줍는다. “이 노트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노트 사용법 제1조다. 라이토는 노트에 이름을 적어 넣은 범죄자가 실제로 죽자, 그 후로 수많은 범죄자를 데스노트를 이용해 살해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범죄 없는 정의로운 신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한다. 그러는 가운데 이 ‘정의의 사도’는 ‘키라’라고 불리면서 여론을 반분한다. 한편에서는 키라야말로 범죄 없는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지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키라 역시 법을 어기는 살인자라고 경계한다. 그러면 이 판타지 스릴러에서 우리는 어떤 철학적 주제를 발견할 수 있을까? 〈데스노트〉라는 제목에 담겨 있듯이 죽음, 아니 ‘죽임’의 의미(제목은 ‘킬링 노트’라고 해야 더 맞을 것이다)? 아니면 ‘사회정의’의 주제? 만화는 물론 이런 것들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 마디로 ‘절대자의 품행기’다. 마음먹은 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절대 권한이다. 라이토는 키라의 이름으로 이 절대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데스노트의 소유자는 사람을 죽일 뿐 아니라, 어떻게 죽일 것인지도 결정한다. 그럼으로써 ‘필연적’으로 죽게 만들면서 그 죽음이 우연처럼 보이게 한다. 우연의 이면에서 필연을 조작하는, 다시 말해 필연이라는 근원적 존재 이유를 우연의 현상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은 신(神)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라이토는 데스노트를 사용하면 할수록 초기의 단순한 ‘처형자’에서, 점점 더 필연적 죽음을 우연처럼 연출하는 ‘운명의 조물주’가 되어 간다. 고대로부터 신의 흉내를 내는 것은 고귀한 것으로 여겨왔다. 한 예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하는 삶’은 신만이 즐기는 ‘부동(不動)의 쾌락’을 흉내내는 일이라는 상상력 넘치는 형이상학을 설파했다. 하지만 인간이 신의 권한을 집행하는 것은, 감히 이야기의 소재로 쓸 엄두도 못 냈다. 신화에서처럼 신탁의 방식으로 풀어가거나 기껏해야 알라딘처럼 정령에게 소원을 빌어 그것이 실현되는 것을 상상해왔을 뿐이다. 그런데 ‘죽임의 절대권 행사’를 주제로 한 이야기를 인기 있게 선택하는 현대 사회문화 환경에는 섬뜩함이 있다.
이런 점에서 만화를 영화화한 가네코 슈스케 감독이 “총으로 쏘고 칼로 베는 것과 달리, 이름을 쓰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뭔가 건전해 보이지 않았다”고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총과 칼로 싸우고 죽이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이름 한번 써서 일방적으로 절대 운명을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슈스케 감독의 느낌은 특별한 게 아니다.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권을 행사하는 주인공이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 만치 버거운 것이다. 상대적 존재의 절대권 행사라는 것은 이제 우리의 관심을 이 작품의 명시적 주제인 ‘정의의 문제’로 되돌린다. 키라는 오로지 살인의 방식으로만 형벌의 세계에 참여한다. 어떤 잘못에도 사형을 심리와 구형도 없이 즉각 집행하는 것과 같다. 범죄를 척결하겠다고 시행하는 ‘죽임의 형벌’ 즉 사형의 근본적인 문제는 상대적인 존재가 절대적 판단을 하고 그것을 실행한다는 데 있다. 이야기짓기의 차원에서 〈데스노트〉는 극단의 ‘변이’로 탄생한 작품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작품의 내용과 함께 그것을 문화적 향유로서 ‘선택’하는 오늘 우리 삶의 환경 모두에 대해 진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오바 쓰구미/오바타 타케시 〈데스노트〉 이야기도 진화론의 법칙을 따르는가 보다. 이야기도 다윈이 주장한 ‘변이’(variation)와 ‘선택’(selection)의 과정에서 진화해 가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오바 쓰구미가 쓰고 오바타 다케시가 그린 만화 〈데스노트〉는 〈알라딘〉 이야기의 돌연변이쯤에 해당된다. 아주 특별한 변종이지만 이야기 구조로 볼 때, 주인공 라이토가 주운 노트는 알라딘이 얻게 된 램프이고, 노트의 사신(死神) 류크는 램프의 정령 지니에 해당된다. 램프는 주인의 소원을 들어주고 노트는 주인이 명하는 것을 실행한다는, 피상적 유사점과 본질적 차이점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굳이 변이와 선택의 진화 이론을 언급하는 것은, 이 작품이 오늘날 대중적으로 대단한 인기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에서다. 생명체의 변이는 자연이라는 환경이 선택하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도 원천적 서사에서 여러 번 변이가 생겨나지만 문화환경이 선택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어쩌면 〈데스노트〉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 환경이 전율할 정도로 특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지 모른다. 왜 그런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열일곱 살의 고교생 야가미 라이토는 어느 날 검은 색 표지의 노트를 하나 줍는다. “이 노트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노트 사용법 제1조다. 라이토는 노트에 이름을 적어 넣은 범죄자가 실제로 죽자, 그 후로 수많은 범죄자를 데스노트를 이용해 살해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범죄 없는 정의로운 신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한다. 그러는 가운데 이 ‘정의의 사도’는 ‘키라’라고 불리면서 여론을 반분한다. 한편에서는 키라야말로 범죄 없는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지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키라 역시 법을 어기는 살인자라고 경계한다. 그러면 이 판타지 스릴러에서 우리는 어떤 철학적 주제를 발견할 수 있을까? 〈데스노트〉라는 제목에 담겨 있듯이 죽음, 아니 ‘죽임’의 의미(제목은 ‘킬링 노트’라고 해야 더 맞을 것이다)? 아니면 ‘사회정의’의 주제? 만화는 물론 이런 것들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 마디로 ‘절대자의 품행기’다. 마음먹은 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절대 권한이다. 라이토는 키라의 이름으로 이 절대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데스노트의 소유자는 사람을 죽일 뿐 아니라, 어떻게 죽일 것인지도 결정한다. 그럼으로써 ‘필연적’으로 죽게 만들면서 그 죽음이 우연처럼 보이게 한다. 우연의 이면에서 필연을 조작하는, 다시 말해 필연이라는 근원적 존재 이유를 우연의 현상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은 신(神)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라이토는 데스노트를 사용하면 할수록 초기의 단순한 ‘처형자’에서, 점점 더 필연적 죽음을 우연처럼 연출하는 ‘운명의 조물주’가 되어 간다. 고대로부터 신의 흉내를 내는 것은 고귀한 것으로 여겨왔다. 한 예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하는 삶’은 신만이 즐기는 ‘부동(不動)의 쾌락’을 흉내내는 일이라는 상상력 넘치는 형이상학을 설파했다. 하지만 인간이 신의 권한을 집행하는 것은, 감히 이야기의 소재로 쓸 엄두도 못 냈다. 신화에서처럼 신탁의 방식으로 풀어가거나 기껏해야 알라딘처럼 정령에게 소원을 빌어 그것이 실현되는 것을 상상해왔을 뿐이다. 그런데 ‘죽임의 절대권 행사’를 주제로 한 이야기를 인기 있게 선택하는 현대 사회문화 환경에는 섬뜩함이 있다.
이런 점에서 만화를 영화화한 가네코 슈스케 감독이 “총으로 쏘고 칼로 베는 것과 달리, 이름을 쓰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뭔가 건전해 보이지 않았다”고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총과 칼로 싸우고 죽이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이름 한번 써서 일방적으로 절대 운명을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슈스케 감독의 느낌은 특별한 게 아니다.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권을 행사하는 주인공이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 만치 버거운 것이다. 상대적 존재의 절대권 행사라는 것은 이제 우리의 관심을 이 작품의 명시적 주제인 ‘정의의 문제’로 되돌린다. 키라는 오로지 살인의 방식으로만 형벌의 세계에 참여한다. 어떤 잘못에도 사형을 심리와 구형도 없이 즉각 집행하는 것과 같다. 범죄를 척결하겠다고 시행하는 ‘죽임의 형벌’ 즉 사형의 근본적인 문제는 상대적인 존재가 절대적 판단을 하고 그것을 실행한다는 데 있다. 이야기짓기의 차원에서 〈데스노트〉는 극단의 ‘변이’로 탄생한 작품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작품의 내용과 함께 그것을 문화적 향유로서 ‘선택’하는 오늘 우리 삶의 환경 모두에 대해 진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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