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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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을 추구하는 동물, 인간- 원신연의 <세븐 데이즈> -
“무시무시한 것이 많다 해도, 인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 그는 사나운 겨울 바람 속에서도 잿빛 바다를 건너며, 내리 덮치는 파도 아래로 길을 연다네./ (…) 재치가 뛰어난 인간은 언어와 바람처럼 날랜 생각과 도시에 질서를 부여하는 심성을 배웠다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이다. 이 말은 인간의 ‘경이로운 능력’ 또는 ‘무시무시한 힘’을 경고하고 있다.
원신연 감독의 <세븐 데이즈>를 보고 나오는데, 문뜩 이 대사가 떠올랐다. 월드스타 김윤진이 주연한 이 영화를 놓고 흥미로운 법정 영화니, 잘 짜여진 액션 스릴러니, 모정에 관한 7일간의 묵시록이니 하고 평론가들이 논란을 펴고 있는 판에, 웬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비극과 연결시키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깊숙이 품고 있다. 더구나 인간에게조차 ‘무서운’ 인간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이 작품에서 쉽게 포착될 수 있는 법적 정의, 진실의 소재, 모성애 등의 주제를 머쓱하게 만드는 생각의 화두이다.
송사에서 승률 100%인 냉혈 변호사 유지연은 하나뿐인 딸에게는 빵점짜리 엄마다. 모처럼 엄마 노릇하기 위해 딸의 운동회에 참가하지만, 딸은 납치당한다. 그리고 걸려온 전화 한 통.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7일 내에 살인범 정철진의 무죄를 입증해서 그를 석방 시켜라!” 이것이 유괴범이자 이제 ‘괴상한 의뢰인’이 된 자의 요구이다. 7일이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 사형이 확정적인 살인범을 석방시키기 위한 지연의 ‘미션 임파서블’이 시작된다. 지연은 유죄가 분명해 보이는 살인범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극한 상황에서 극단의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반전을 알고 봐도 그 과정이 재미있기 때문에 영화를 즐기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거예요”라는 감독의 말을 믿고 영화 내용 일부를 슬쩍 흘려보자. 지연이 극단의 성취를 추구하는 한편에서 또 다른 극단을 실현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는 바로 딸을 유괴해서 지연을 협박하는 ‘괴상한 의뢰인’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극단의 복수’이다. 어떤 방법으로 할까? 그것은 영화를 보면 안다.
2500년 전의 비극작가도 인간이 경이롭고 무섭다고 했다. 인간이 무서운 이유는 ‘극단을 추구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세븐 데이즈>에서는 극단의 변론과 극단의 복수를 성취하고자 한다. 이런 극단에의 도전 과정은 불가능과 가능의 미묘한 접점을 보여준다. 곧 어떠한 불가의 상황에도 항상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이 가능의 틈새에 혼신의 열정으로 자아를 투척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인간을 이렇게 만드는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뇌의 활동이고, 철학적으로는 정신의 힘 또는 마음의 힘이다. 곧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하, 바로 이 점에서 전통적 영육이원설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고개를 쳐드는구나. 영화에서도 극단의 변론은 정신의 싸움이며, 극단의 복수는 마음의 분노로 지독하게 바라는 것 아닌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철학적 화두를 포착한다. 일상에는 우선적으로 몸이 참여하지만, 비일상적인 극단적 상황은 절대적으로 혼이 조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또 한번 사람이 무섭다. 이 인간적 ‘자아 공포’는 거의 신비로울 정도다. 그래서 또한 인간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해진다. 칸트는 이성이 갖는 모든 관심은 세 가지 물음에 집약된다고 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무엇을 바라도 되는가? 그리고 만년에 앞의 세 물음에 ‘네 번째 물음’을 첨가했다. 그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였다. 그는 앞의 세 질문들은 모두 네 번째 질문에 귀결된다고 했다. 그런데 칸트가 묻지 않은 것이 있다. ‘인간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인간이 극단을 추구하는 동물이라면, 모든 분야에서 극단의 정점을 넘어서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과학-기술 발달에 의한 삶의 변화 속도가 극단에 이르러서 인류 역사의 천이 팽팽하게 늘어나 찢어지는 지점에 이르게 되는데, 과학자들은 이 지점을 ‘특이점’이라고 부른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레이 커즈와일의 말을 빌리면, 이 시점에서 “당신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과 마음이 극단을 추구하면서 그 정점을 넘어서는 특이점에 이르면 인간은 무엇이 될까? 괜한 상상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오늘날의 상상이 아니라, 바로 익스트림하게 사고하기, 곧 서구 철학에 줄곧 내재해왔던 암호이다. ‘2시간으로 압축된 세븐 데이즈’의 짧고 긴박한 스토리에서 화두를 얻어 ‘2500년 간의 암호’ 그 긴 역사를 잠시 돌아보았다. 철학의 넘나들기란 이런 것이다. 김용석 산대 교수
2500년 전의 비극작가도 인간이 경이롭고 무섭다고 했다. 인간이 무서운 이유는 ‘극단을 추구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세븐 데이즈>에서는 극단의 변론과 극단의 복수를 성취하고자 한다. 이런 극단에의 도전 과정은 불가능과 가능의 미묘한 접점을 보여준다. 곧 어떠한 불가의 상황에도 항상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이 가능의 틈새에 혼신의 열정으로 자아를 투척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인간을 이렇게 만드는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뇌의 활동이고, 철학적으로는 정신의 힘 또는 마음의 힘이다. 곧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하, 바로 이 점에서 전통적 영육이원설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고개를 쳐드는구나. 영화에서도 극단의 변론은 정신의 싸움이며, 극단의 복수는 마음의 분노로 지독하게 바라는 것 아닌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철학적 화두를 포착한다. 일상에는 우선적으로 몸이 참여하지만, 비일상적인 극단적 상황은 절대적으로 혼이 조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또 한번 사람이 무섭다. 이 인간적 ‘자아 공포’는 거의 신비로울 정도다. 그래서 또한 인간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해진다. 칸트는 이성이 갖는 모든 관심은 세 가지 물음에 집약된다고 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무엇을 바라도 되는가? 그리고 만년에 앞의 세 물음에 ‘네 번째 물음’을 첨가했다. 그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였다. 그는 앞의 세 질문들은 모두 네 번째 질문에 귀결된다고 했다. 그런데 칸트가 묻지 않은 것이 있다. ‘인간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인간이 극단을 추구하는 동물이라면, 모든 분야에서 극단의 정점을 넘어서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과학-기술 발달에 의한 삶의 변화 속도가 극단에 이르러서 인류 역사의 천이 팽팽하게 늘어나 찢어지는 지점에 이르게 되는데, 과학자들은 이 지점을 ‘특이점’이라고 부른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레이 커즈와일의 말을 빌리면, 이 시점에서 “당신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과 마음이 극단을 추구하면서 그 정점을 넘어서는 특이점에 이르면 인간은 무엇이 될까? 괜한 상상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오늘날의 상상이 아니라, 바로 익스트림하게 사고하기, 곧 서구 철학에 줄곧 내재해왔던 암호이다. ‘2시간으로 압축된 세븐 데이즈’의 짧고 긴박한 스토리에서 화두를 얻어 ‘2500년 간의 암호’ 그 긴 역사를 잠시 돌아보았다. 철학의 넘나들기란 이런 것이다. 김용석 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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