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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델러웨이에게 남기고 떠난 ‘사소한 기쁨’

등록 2008-04-04 21:56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

‘델러웨이 부인’을 통해서 본 ‘일상’의 의미

<델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 울프가 1925년 발표한 작품이다. 당시 울프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매료되어 있었다. 자신이 가진 천부적 재능을 항상 의심했던 울프는 일기에 “이번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하지 않을까 자문해 본다. 그렇지만 프루스트에 비하면 물론 그러지 않겠지”라고 썼다. 그럼에도 프루스트 소설보다 더 재미있고 조이스 소설보다 덜 난해한 이 작품은 울프의 우려를 넘어 현대문학의 위대한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이야기는 1923년 6월 어느 날 하루를 서술한다. 주인공 클라리사 델러웨이 부인이 저녁파티에 사용할 꽃을 사러 집을 나서는 아침에 시작하여 파티가 진행되는 저녁에 끝난다. 그 사이에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은 전혀 없다. 프루스트나 조이스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델러웨이 부인>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사건들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돌발적으로 떠오르는 주관적 체험과 생각, 감정 등에 초점을 맞춘다. 그 결과 원래의 제목이 ‘시간’이었던 이 작품에는 런던탑에 걸린 빅벤이 시간마다 알려주는 ‘외적인 시간’과 인물들의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내면적 시간’이 뒤섞여 있다. 예를 들면, 웨스트민스터 상가를 걸어가던 클라리사는 갑자기 젊은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낭만적 사랑을 떠올린다. 이때 빅벤이 울리고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회상에서 깨어난다. 이후에도 그녀는 다시 또 다른 회상에 잠기다가 예컨대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일들을 통해 현실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한다. 클라리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빅벤의 종소리를 따라 단선적으로 흘러가는 외적 시간 사이에 갑자기 떠오르는 추억이나 예측 같은 내적 시간들이 마치 땅속에 묻힌 감자들처럼 주렁주렁 매달린다. 그럼으로써 현실 세계와 내면의 세계, 일상성과 내적 성찰이 뒤섞인 진실이 드러난다. 이러한 기법을 울프는 ‘터널 파기’라고 이름 지었다.

클라리사는 특이한 인물이다. 중견 정치가의 “완벽한 안주인”인 그는 외적으로는 허영에 가득 찬 사교계를 대변한다. 이날 밤에도 마치 버킹엄 궁에서 손님을 맞는 여왕처럼 파티의 중심에 섰다. 그래서 옛 애인인 피터 월시조차 그를 ‘속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사실상 속물들이 득실대는 사교계를 참기 어려워한다. 이처럼 현실과 내면이 불화를 겪는다는 점에서 그는 작품의 다른 주요 인물인 셉티머스 스미스와 맥이 닿아 있다. 전쟁에서 얻은 정신적 상처에 시달리는 퇴역군인 셉티머스는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황태자가 지나가는 공간과 때마다 빅벤이 울려대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그래서 창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주목할 것은 셉티머스와 똑같은 삶에 대한 공포ㆍ무력감ㆍ혐오감에 억눌리면서도 클라리사는 파티를 끝내고 “평화와 안도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삶에 대한 그의 흔들리지 않는 태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모든 것을 불안하고 무의미하며 혐오스럽게 만드는 시간에 대항하여 “끝끝내 살며” “조용히 걸어가게” 하는 그의 놀라운 용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

울프는 스스로 던진 이 ‘진지한’ 물음을 뒤로하고 1941년 어느 화창한 봄날 우즈 강에 몸을 던져 셉티머스를 따라갔다. <델러웨이 부인>의 미국판 서문에 울프는 셉티머스가 클라리사의 ‘분신’이라고 썼다. 거짓말이다. 셉티머스는 울프 자신의 분신이었다. 클라리사는 오히려 “저 하늘, 저 장엄한 하늘”,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덧없는 아름다움들, 그리고 순간마다 “그 순간의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사소한 추억들, 한마디로 ‘일상이 주는 덧없고 사소한 기쁨들’을 사랑했다. “이렇게 의자를 바로 놓고 책을 한 권 책장에 밀어 넣으면서 일상에 골몰하여 자기 자신을 잃고 살아가다가도 해가 뜨고 날이 저무는 것을 보며 문득 기쁨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 비길 만한 즐거움은 없다”고 생각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심벨린>의 후렴을 빌려 “이제는 뜨거운 햇빛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스스로에게 충고도 했다. 바로 이것이 “새처럼 겁이 나서 몸을 웅크렸다가도 차차 생기를 회복하여 한없는 기쁨의 불꽃을” 일으키게 하는 비결이었다. 물론 새로운 지혜는 아니다. 일찍이 에피쿠로스도 일상의 소중함을 교훈했다. 카르페 디엠! 열매를 따듯이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라는 말이다. 그렇다. 뜨거운 햇빛을 두려워하지 말고 일상을 사랑하자. 마지막 순간 울프는 클라리사가 무척이나 부러웠을 것이다. 봄이다. 이번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화단이나 화분에 좋아하는 꽃들을 심어보자. 지난 일들도 떠올려보자. 이런 일상의 사소한 기쁨들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다.


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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