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
‘일리아스’를 통해 본 ‘예술’의 의미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유럽문학은 이 구절로 시작되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이렇게 시작하기 때문이다. 총 24권, 대략 1만5천행으로 된 장대한 서사시 <일리아스>는 첫 행부터 대뜸 주제로 뛰어든다.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그것이다. 약 2800년 전에 살았던 호메로스는 10년 동안 전개된 트로이 전쟁을 마지막 단 50일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 그려낸다. 줄거리는 이렇다. 그리스 왕 아가멤논과 다툰 아킬레우스는 분노하여 전투를 거부한다. 그 사이에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가 연이어 승리를 거머쥔다. 그러자 아킬레우스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가 나가 트로이군과 싸우다 헥토르에게 죽는다. 이에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과 화해하고 다시 전투에 참가한다.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분노가 더 크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여 전차에 매달아 끌고 돌아와 파트로클로스의 무덤 주위를 세 번 돈다. 그러나 헥토르의 아버지인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간청에 시신을 돌려준다. 이것이 전부다. 호메로스는 전쟁이 일어난 이유, 지난 9년 동안에 일어난 일, 다가올 아킬레우스의 죽음, 트로이의 패망 등은 단지 군데군데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이나 암시를 통해 알게 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자신이 제시한 주제에만 집중한다.
500년이 지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호메로스의 이러한 작품 스타일을 서사시와 비극의 모범으로 높이 평가했다. 스토리 구성에서 “전체에서 한 부분만 취하고 그 외의 많은 사건은 삽화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예술은 역사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더욱 흥미로운 평가가 영국의 고전학자인 키토의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에 실려 있다. 키토는 말하기를, 호메로스는 사물들에는 통일성이, 사건들에는 원인과 결과가, 세상에는 어떤 도덕법칙이 존재한다는 생각의 ‘틀’을 가진 “최초의 유럽인”이며 “암흑의 시대 한가운데 갑자기 번쩍 솟아오른 불꽃”이라고 한다. 호메로스는 이 ‘틀’에 끼워 맞춰지는 것만을 작품에 담고 그 밖에 모든 것들은 간략하거나 생략했다. 그의 이러한 ‘작품 스타일 덕분에’ 나중에 유럽문명의 본질로까지 발전한 사고, 곧 개별적인 사실에서 보편적인 법칙을 이끌어내는 사고가 그리스에서 맨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인들은 <일리아스>를 암송하면서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가 헬레네를 돌려보내지 않아 전쟁의 고통과 멸망을 감수했다는 역사적 사실뿐 아니라, 잘못된 판단으로 취한 행위는 반드시 나쁜 결과를 낳는다는 보편적 교훈을 얻었다. 또한 영웅 아킬레우스도 명예를 위해서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다는 개별적 사실뿐 아니라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일반적 법칙을, 헥토르가 사랑하는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킬레우스와 싸우러 나갔다는 개인적 사건뿐 아니라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는 도덕을 배웠다. 요컨대 호메로스는 자신의 작품 스타일을 통해 드러나는 일반적인 삶의 진리들을 그리스인들에게 부단히 깨우쳐주었다. 키토는 이것이 그리스인들이 오늘날까지도 청소년 교육과 성인들의 훈련을 호메로스의 작품들에 의지하는 까닭이며, 플라톤이 호메로스를 질투한 이유라 한다.
예술이 삶의 진리와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은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예술은 현실적인 것의 모방이나 모사가 아니고 인간 정신의 표출도 아니라고 했다. 예술은 오직 어떤 것이 그것으로서 존재하는 의미, 곧 농부화가 농부화로서, 신전이 신전으로서 존재하는 의미를 드러나게 하는 ‘탁월한 방식’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바탕과 터전, 곧 ‘대지’를 마련해준다. 예컨대 그리스 신전은 드높이 우뚝 솟아 있음으로써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허공을 보이게 하고, 또 흔들리지 않음으로써 휘몰아치는 폭풍의 광란을 드러나게 한다. 동시에 이 런 성스러움을 내보임으로써 “탄생과 죽음, 재난과 축복, 승리와 굴욕, 존속과 쇠망”이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운명으로 드러나게 한다. 신들이 싸우는 그리스의 문학작품들도 사실인즉 신들의 싸움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인간들이 살아갈 대지, 곧 “무엇이 신성하며 무엇이 비속한지, 무엇이 위대하며 무엇이 하찮은지, 무엇이 용감하며 무엇이 비겁한지, 무엇이 고결하며 무엇이 천박한지”를 열어 밝힌다. 한마디로 “사물들에게는 비로소 사물들 자신의 모습을 주고, 인간들에게는 비로소 그들 자신의 전망을 주는” 것이 곧 예술이다. <일리아스>는 그랬다. 그래서 우뚝 선 신전처럼 수천년을 산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오늘날 예술작품들은 어떤가? 최근 서울의 한 갤러리에서 모 대학 교수가 관람객 가운데서 창녀를 찾아내는 사람에게 돈을 주는 행사를 벌렸다 한다. 이것이 예술인가? 생각해 보자.
김용규 자유기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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