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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어정쩡’하게 살지 않기

등록 2008-04-18 18:50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서 본 ‘자유’의 의미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이 나왔다. 그가 생전에 써놓았다는 묘비명이 멋지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런 묘비명은 ‘사실은’ 바라는 것도 많고 두려운 것도 많아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사람이 쓰는 법이다. 자고로, 영혼을 사랑하는 수도승은 영혼의 승리를 바라고 육체의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육체를 사랑하는 난봉꾼은 육체의 승리를 바라고 영혼의 패배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런데 카잔차키스는 영혼과 육체 모두를 사랑하고 각각의 승리를 바랐다.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은 당연히 두려움도 많고 자유롭지도 않다. 그는 영혼의 패배가 두려울 때 <붓다>와 <성 프란체스코>를 썼고, 육체의 패배가 두려울 때 <그리스인 조르바>를 썼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작가가 실존인물인 조르바와 함께한 몇 달의 경험을 적은 1인칭 소설이다.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던 어느 항구에서 작가는 조르바를 처음 만난다. 작가는 “인생은 재미있는 연극이어서 촌놈이나 바보만이 무대로 뛰어올라가 연기에 가담한다는 듯이” 방관적으로 살아왔다. 그런 만큼 삶에 대한 후회와 두려움이 많다. 반면에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 하는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라고 대드는 조르바는 말 그대로 “하고 싶은 대로” “화끈하게” 살아왔다. 그런 만큼 후회나 두려움 따위는 없다. 작가는 “섬약한 손과 창백한 얼굴, 피투성이가 되어 진창에 굴러 보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조르바는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라며 자랑스러워한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곧바로 의기투합하여 함께 섬으로 가 갈탄광을 빌려 작가는 주인으로 조르바는 감독으로 일한다. 이때에도 작가는 “일꾼들에게 임금을 주는” 방관자에 불과하고, 조르바는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다”라며 열정을 쏟는다. 여자관계도 마찬가지다. 조르바는 도착하자마자 호텔 여주인을 꿰찬다. 그러나 작가는 매혹적인 젊은 과부를 멀리서 훔쳐보기만 한다. 소설은 결국 두 여인이 차례로 죽고 사업이 망한 다음, 두 사람이 헤어지며 끝난다.

그러나 작가는 그동안 조르바에게서 후회와 두려움 없이 사는 방법을 배운다. 조르바의 가르침은 이랬다. 가령 뭘 먹고 싶으면 “목구멍이 미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 나게” 하는 것이다. 담배, 술, 여자에 대한 욕망도 마찬가지다. 조르바는 인간의 욕망은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도저히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이 방법만이 “사람이 자유를 얻는 도리”라고 주장한다. 힘껏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삶에 대한 후회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말이다. 한데 이 ‘나름의 비법’이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적어도 2300년 전에 에피쿠로스라는 철인이 쾌락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미 교훈했기 때문이다. 조르바는 20세기를 산 에피쿠로스다. 에피쿠로스가 “그대는 단 한 번뿐인 유일한 인생을 행복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가르친 말을 조르바는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라고 표현했다. 또 에피쿠로스가 “모든 일은 오늘 여기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그대가 행복하게 산다는 데에 달려 있다”라고 가르친 것을 조르바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은 묻지도 않지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라고 중얼댔다.

에피쿠로스는 금욕주의로 알려진 스토아 철학을 창시한 제논과 동시대인이자 위대한 경쟁자였다. 철학의 임무가 ‘인간을 삶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같았다. 그러나 방법이 달랐다. 제논은 금욕과 절제를 통해서만 삶에 대한 불안과 절망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자유로워진다고 주장했고,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따라 쾌락을 추구함으로써만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찾는다는 점에서는 난봉꾼이나 수도승이 같다. 다만 난봉꾼에게는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고통이고 욕망을 따르는 것이 즐거움인데, 수도승에게는 그것이 반대일 뿐이다. 자유도 마찬가지다. 자유를 갈망하는 데서는 쾌락주의자와 금욕주의자가 다르지 않다. 단지 욕망에 순종함으로써 얻는 자유와 욕망을 조절해서 얻는 자유가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난봉꾼으로 사느냐, 수도승으로 사느냐가 아니다. 무엇으로 살든 “어정쩡하게” 살지 않는 것이다.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조르바가 남긴 교훈이다. 혹시, 동의하는가? 그럼 따라 해보자.

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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