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시각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키워드는 ‘변화’와 ‘다양성’이었다. 이날 시상식은 흑인 여성이자 성소수자로 꼽히는 배우 겸 가수 저넬 모네이의 공연으로 시작해 그 의미를 더했다. 로스앤젤레스/AP 연합뉴스
‘<기생충>이 아카데미를 휩쓸면서 아카데미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정도로 다양해졌다.’(영국 <비비시>)
제92회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의 핵심 키워드는 ‘변화’와 ‘다양성’이라 할 수 있다. 전세계 영화계에서 변방으로 취급받던 아시아, 그것도 한국의 <기생충>이 국제영화상은 물론 아카데미 주요 부문 5개 중 3개(작품상·감독상·각본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것은 아카데미가 추구하는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뉴욕 타임스> 등 전세계 주요 매체와 통신은 <기생충>의 이번 수상을 “오스카를 넘어 전세계 영화사를 새로 썼다”고 대서특필했다.
<기생충>의 4개 부문 수상 외에 <1917>의 촬영상·시각효과상·음향믹싱상 등 3개 부문 수상이나 <조커> 호아킨 피닉스의 남우주연상, <주디> 러네이 젤위거의 여우주연상,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브래드 핏의 남우조연상, <조조 래빗>의 각색상 등 다른 부문의 수상작·수상자들은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기생충>이 “반전의 중심” “아카데미 변화의 핵”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현지시각으로 9일 저녁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출연 배우들과 함께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FP 연합뉴스
로스앤젤레스 현지에서 시상식을 지켜본 윤성은 평론가는 “아카데미 내부에서 다양성을 존중하고 시상식 전체를 쇄신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게 퍼져 있었다. 아카데미 회원 구성을 여성, 제3세계 영화인 등 다양화한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이다. 아시아·제3세계 영화에 새롭게 눈을 돌려야 한다는 시대적 흐름이 맞아떨어진 결과가 바로 <기생충>의 4개 부문 수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 할리우드 히어로물마저 여성 영웅, 흑인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는 등 이런 기류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기생충>의 수상으로 다른 작은 나라의 영화에도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수십년간 ‘백인들만의 리그’라는 비아냥을 들어온 아카데미의 변화는 사실 이날 시상식의 초반부터 감지됐다. 배우 겸 팝가수 저넬 모네이가 호스트 없이 오프닝 공연을 장식하며 아카데미의 포문을 열었다. 흑인 여성이자 성적 소수자로 꼽히는 그의 등장에 객석에서 환호가 터졌다.
축하 공연 중 주제가상 후보로 오른 영화 <겨울왕국2>의 오에스티(OST) ‘인투 디 언노운’ 무대 역시 다양성에 방점이 찍혔다. 이날 무대에는 원곡 가수 이디나 멘젤뿐 아니라 덴마크·독일·일본·노르웨이·폴란드·러시아·스페인·타이 등 10개국 ‘엘사’가 등장해 현지 언어로 노래를 불렀다. 아카데미가 미국을 넘은 전세계의 축제임을 천명한 무대라 할 수 있다. 이 밖에 한국계 배우인 샌드라 오 등 각 부문의 시상자 역시 다양한 인종으로 안배한 점도 눈에 띄었다.
시상자로 나선 배우 시고니 위버는 아카데미가 추구해야 할 다양성의 키워드 중 가장 중요한 지점이 ‘여성’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캡틴 마블>을 연기한 브리 라슨, <원더우먼> 갈 가도트와 함께 무대에 서 “모든 여성이 슈퍼히어로”라고 치하했다. 이어 음악상을 수상한 <조커>의 힐뒤르 그뷔드나도티르 음악감독 역시 “모든 여성, 소녀들, 어머니들, 딸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꼭 목소리를 내시기 바란다. 우리는 여러분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참석자들이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이날 시상식에서는 92년 역사 중 처음으로 여성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그 의미를 더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의 변화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일부의 비판도 나왔다. 연기상 부문 후보에 지명된 유색인종 배우는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신시아 어리보(<해리엇>)가 유일하다는 점, 감독상 후보에 여성 감독이 없다는 점 등이 비판의 핵심이다. 남우조연상을 시상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 배우 겸 코미디언 크리스 록은 “정말 훌륭한 감독이 후보에 올랐지만 여성 감독이 빠졌다”고 지적했으며, 함께 무대에 오른 스티브 마틴도 “지난 92년 동안 얼마나 아카데미가 바뀌었는지 생각해보라. 1929년에 흑인 후보가 단 한명도 없었는데, 2020년에는 딱 한명이 있다. 정말 많이 변했다”며 아카데미의 여전한 한계를 위트있게 꼬집었다.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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