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가 내년부터 ‘기후공시’를 의무화하면서 개괄적 수준에서 관련 정보를 공개해온 국내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사진은 동해안의 송전탑 사이로 붉은해가 떠오르는 모습. 연합뉴스
기후변화 가속화로 전 세계 150개 나라가 탄소중립 목표를 설정한 가운데, 온실가스 감축은 산업계의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무엇보다 기업의 기후대응 관련 정보공개를 강제하는 이른바 ‘기후공시’ 의무화가 임박하면서 탄소 배출량이 많은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당장 내년부터 국내 기업들은 달라진 국제 공시환경과 맞닦뜨려야 한다. 기후공시 제도의 ‘빅3’로 불리는 국제회계기준(IFRS) 재단 산하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와 미국의 증권거래위원회(SEC), 유럽연합(EU)의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이 공시 기준을 정했거나 곧 확정하기 때문이다.
기후공시는 지금까지 비재무적 요소였던 기후대응 정보가 재무적 요소와 같은 가치로 취급된다는 것을 뜻한다. 은기환 한화그린히어로펀드 책임운용역은 지난 7월18일 국회에서 열린 기후공시 토론회에서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과 대응 전략 등 기후위기와 관련한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면, 탄소가격으로 그 위험의 정도를 재무적으로 측정하고 반영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에쓰오일이 작년에 발표한 (9조원 규모) 울산 석유화학 플랜트 투자의 경우 온실가스 배출량의 잠재적 비용 등 신규 투자로 인한 위험요인을 전혀 공개하지 않았다”며 “만약 신규 투자와 관련한 엄격한 비재무정보 공시가 의무화돼 있고, 탄소가격제가 제대로 작동했더라면 에쓰오일이 이런 투자결정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핫이슈로 떠오른 기후공시
유럽 최대 연기금 운용사인 네덜란드 에이피지(APG)는 지난해 초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기업 10곳에 서한을 보내 탄소 배출량의 실질적인 감축을 요구했던 적이 있다. 연금자산 규모가 850조원에 이르는 세계 3대 연기금 운용사인 에이피지는 국내 기업들의 지분을 대거 보유한 주요 주주다. 이 서한이 발송된 지 6개월여 만에 삼성전자는 ‘RE100’(사용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자는 글로벌 프로젝트) 가입을 선언했다. 글로벌 금융투자기관들이 기후변화 이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특히 온실가스 다배출 기업들의 압박감이 커졌다.
국제사회가 ‘기후공시’를 강제하게 되면 기업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경영 리스크 관리에 들어가야 한다. 기후 대응 관련 재무적 위험과 기회 요인을 산출해야 하는 것은 물론 허위로 기재된 게 없는지 신경을 곤두 세울 수밖에 없다. 그린워싱으로 눈속임하거나 공시를 소홀히 했다간 미국처럼 관련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나라에서 각종 소송 리스크에 휘말릴 수도 있다. 미 증권거래위원회의 기후공시 규칙안은 미국 기업뿐 아니라 포스코, 신한금융지주, 엘지(LG)디스플레이, 케이티(KT) 등 뉴욕증시에 상장한 한국 기업들에게도 적용되는 사안이다. 기업들이 원하던 원치않던 기후위기 대응과 함께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할 때가 온 것이다.
현재 국내 기업들이 환경·사회·지배구조(ESG)의 비재무적 정보를 공개하는 창구로 가장 많이 활용하는 것은 지속가능경영보고서다. 상장기업 중 지속가능보고서를 발간하는 기업은 150곳에 이른다. 이 보고서에 공개되는 이에스지 정보는 일종의 자율공시다. 자율공시는 의무공시와 달리 공시 항목과 정보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다. 이 때문인지 지속가능보고서를 발간하는 기업은 늘어나고 있으나, 그 내용이 충실하지 않고 ‘홍보’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녹색전환연구소가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국제 권고안(TCFD)의 지표를 바탕으로 올해 국내 온실가스 다배출 기업 상위 32개 기업의 비재무공시를 분석했더니, 평균점수가 100점 만점에 38점에 그쳤다. 권고안은 주요 20개국(G20) 주도의 금융안정위원회(FSB)가 만든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협의체의 지침이다. 배보람 녹색전환연구소 연구원은 “탄소중립이 기업의 경영목표로 내재화 되지 않거나, 기후관련 위험과 기회에 대한 분석이 지나치게 개괄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 한계”라고 평가했다. 노종화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변호사)은 “경제개혁연구소도 주요 산업을 대표하는 10개 기업에 대한 평가를 해봤는데, 정보공개를 이행했다는 것 자체 말고는 실효성 있고 유의미한 정보공개가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려웠다”며 “기후공시의 충실성이나 구체성은 단순히 정보공개의 문제라기보다 국제 기준에서 요구하는 수준만큼 기후변화 대응을 이행하지 못하는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자발적 공개, 실효·구체성 떨어져
이에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에스케이(SK)하이닉스, 포스코, 엘지(LG)화학 등 국내 5개 대기업의 2022~2023년도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살펴봤다. 기업별로 100~200쪽의 방대한 분량을 할애해 이에스지 정보를 수록했는데, 그 중에서 환경(E), 특히 기후 대응 정보의 실효성은 꼼꼼히 따져봐야 할 사안이다. 전반적으로 온실가스 배출량과 에너지 사용량, 친환경 에너지기술, 자원순환 및 리사이클 등 이에스지 전략 속에 기후 대응 노력을 보여주려고 애쓴 흔적이 배어 있고 양적으로 진일보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나열식 서술이 많고 일부 보고서는 장황한 느낌을 줬다. 온실가스 배출이 원가에 끼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인지, 연간 감축 목표치에 미달했다면 원인은 무엇이고 제품 공정에서 개선 과제가 무엇인지 설명이나 해석이 없었다. 국내외 사업장별 온실가스 배출 비중은 얼마이고, 전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투자자나 이해관계자 입장에서 이 보고서만으로 어떤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단순히 열거된 수치로 상호 연관성과 유의미성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직·간접 온실가스 배출 영역인 ‘스코프(Scope)1, 2’에 머물지 않고 ‘기타 배출 영역’으로 분류되는 ‘스코프3’ 영역에서 온실가스 배출 항목을 공개한 것은 의미 있는 진전으로 평가된다. 스코프3은 기업 활동에서 발생하는 직·간접적인 탄소 배출량 뿐만 아니라 협력업체, 물류, 제품 사용과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치사슬 전반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세계지속가능발전기업협의회(WBCSD)와 세계자원연구소(WRI)가 제시한 탄소 배출량 산출 영역으로, 2025년부터 스코프3에 맞춰 공시 의무를 적용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기업에서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부문이다.
앞서 5개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을 검증한 기관들은 모두 ‘적정 의견’을 제시했다. 이들은 검증보고서(또는 검증의견서)에서 “검증과정 중 온실가스 배출량 산정에 중대한 오류가 발견되지 않았고 관련 활동자료와 증빙이 적정하게 관리되고 있음을 확인했다”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본 검증은 회사에서 설정한 산정기준 자체의 타당성 확인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며 검증의 한계를 인정했다. 오덕교 한국ESG기준원 선임연구위원은 “기업이 준 자료만 갖고 하는 제한적 검증을 지양하고, 어떻게 배출량을 산출하고 오류는 없었는지 합리적 검증을 해야 한다”며 “필요하다면 검증기관의 자격 요건을 마련해 등록제로 운영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국내를 대표하는 5개 기업에서 발간한 2022~2023년도 지속가능경영보고서. 홍대선
기후공시는 기후 관련 재무적 위험과 기회를 투자자 뿐만 아니라 이해관계자들이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 만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이 필요하다. 현재 기후공시 표준화 작업을 진행중인 곳은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와 미 증권거래위원회, 유럽연합의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 등 3곳이다. 유럽연합이 공시 기준을 확정한 데 이어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도 지난 6월 세계적으로 통용될 이에스지 공시 기준의 최종안인 S1과 S2를 내놓았다. S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의 약자이다. S1은 일반 요구사항이고, S2는 기후변화 관련 요구사항이다. 미 증권거래위원회도 올해 안에 상장사의 기후공시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확정한다. 나라별로도 기후공시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홍콩증권거래소는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의 보고 기준에 맞춰 2024년부터 모든 상장사의 기후공시를 의무화할 계획이다.
발등에 불 떨어진 온실가스 다배출 기업
현재 우리나라는 사업보고서 또는 거래소 자율공시를 통해 일부 제한된 환경 정보를 공시하거나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을 뿐, 일반투자자에게 제공되는 환경공시 체계는 아직 도입되지 않았다. 다른 나라에 비해 늦었지만 최근 기후공시 도입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의무 적용을 확대하고 있다.
2025년부터 자산 2조원 이상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은 이에스지 정보를 담은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의무적으로 공시해야 한다. 그동안 자율적인 정보공개 활동의 하나였던 지속가능보고서를 이제 글로벌 흐름에 따라 의무 공시로 전환해야 한다는 얘기다. 환경 부문에서 온실가스 배출량 측정과 검증에 필요한 명확한 기준, 기업 간 정보 격차는 풀어야 할 과제다.
금융위원회는 올 연말까지 공시에 대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확정해 발표할 예정이다. 다만 재계는 “최근 추진되는 이에스지 공시기준이 기업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줄 수 있다”며, “공시 의무화 일정을 최소 1년 이상 늦춰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거론되는 2025년부터 단계적 의무화 방안은 해외 주요국과 비교할 때 현저히 늦은 수준이다. 글로벌 표준에 뒤처져 초래할 손실은 기업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김태한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수석연구원은 “상당수 국내 기업이 이미 해외투자자와 고객사들로부터의 압력에 직면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공시시기를 늦춰 기업의 부담을 낮춰준다는 기존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공시시기를 앞당기고 이에 맞는 지원을 하는 방향으로 선회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홍대선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어젠다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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