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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롯데, 퇴직임원을 사외이사·감사로…‘황제경영’ 견제장치가 없다

등록 2015-08-12 22:10수정 2015-08-13 11:21

[롯데가 던진 과제/견제 없는 오너리스크] (상)
롯데 상장사 6곳, 304차례 이사회 안건 전부 ‘만장일치’ 처리
304회 이사회 가운데 이견 노출 0회.

12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분석한 자료를 보면, 롯데 상장사들에서 2012~2014년 열린 이사회의 안건 처리는 만장일치의 행진이었다. 앞서 신동빈 롯데 회장은 11일 대국민 사과와 지배구조 개선책을 발표하면서 “국내에 상장된 8개 계열회사 매출액이 그룹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이들 상장사는 롯데쇼핑·케미칼·제과·칠성·푸드·하이마트·손해보험과 현대정보기술이다.

이처럼 중요한 8개 상장사에서는 지난 3년간 주요 경영안건을 처리하기 위해 359차례의 이사회가 열렸다. 하지만 이들 상장사의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이사회가 부결시킨 안건은 아예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사내외 이사들의 안건별 찬반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롯데케미칼과 현대정보기술을 뺀 나머지 6개사의 304차례 이사회에서는 오로지 만장일치 행진만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303차례에선 ‘찬성’ 만장일치였고, 롯데쇼핑에서 2013년 딱 한 차례 만장일치 보류가 있었을 뿐이다. 롯데케미칼과 현대정보기술이 같은 기간에 개최한 55차례의 이사회에서는 이사들의 찬반 정보는 알 수 없으나, 안건은 모두 가결로 통과됐다.

이는 총수 일가를 비롯해 회사 경영진이 어떤 결정을 내리면 이를 관리·감독해야 할 이사회가 그저 ‘거수기’ 노릇만 했음을 보여준다. 대주주 경영인의 ‘손가락’에 사내이사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다 대주주에 대해 상대적으로 독립성이 요구되는 사외이사·감사조차 전직 계열사 임원 출신이 선임되는 상황이다. 상법상 요구되는 ‘선관 의무’(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가 제대로 이행되리라 기대하기 어려운 분위기인 셈이다.

롯데 주요 상장사 이사회의 안건 처리 만장일치 현황
롯데 주요 상장사 이사회의 안건 처리 만장일치 현황
실제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은 지난달 17일 직접 쓴 해임지시서로 둘째 아들 신동빈 회장을 해임했으며, 27일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손가락’으로 신동빈 회장과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들을 지목하고 해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롯데 일부 사외이사는 전직 롯데 임원 출신인 점이 큰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애초 사외이사는 사내이사와 달리 평소에는 자기 일에 종사하다 1분기에 한 차례 이상 열리는 이사회에 참석해 회사 경영을 감시하도록 마련된 자리다. 하지만 손가락 경영의 대상이었던 전직 롯데 계열사 임원이 버젓이 사외이사를 맡고, 이들이 다시 감사를 겸임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롯데쇼핑 사외이사로 2014년 3월 선임된 고병기씨는 2008년까지 롯데알미늄에서 일했다. 고병기 사외이사 이전에도 롯데케미칼 출신의 김원희 사외이사가 감사위원을 겸임한 적이 있다. 이밖에도 롯데케미칼 임지택(롯데제과), 롯데제과 박재연(롯데제과), 롯데칠성 김광태(롯데푸드) 등의 사외이사가 롯데 출신들이다.

이런 문제는 롯데뿐 아니라 다른 재벌 그룹에서도 흔히 드러나 우리 사외이사 제도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 한화그룹은 한화 노선호(한화증권), 한화케미칼 한동석(한화타임월드), 한화갤러리아타임월드 홍남표(한화호텔앤드리조트), 한화손해보험 이종학(한화종합화학) 등도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데 이들 모두 같은 그룹 계열사 출신이다.

롯데·한화 계열사 내 전직 임원 출신 사외이사 현황
롯데·한화 계열사 내 전직 임원 출신 사외이사 현황

전직임원이 사외이사에 버젓이
한화 등도 ‘거수기 역할’ 비슷
사외이사가 감사 겸임하기도

‘이사회 기능 강화’ 등 상법 개정
박 대통령 약속해놓고 태도 바꿔

이에 따라 총수 일가의 ‘손가락 경영 리스크’를 견제할 내부 통제 시스템이 사실상 무너져 있는 상황에서 이사회와 감사가 제구실을 할 수 있도록 상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앞서 신격호 총괄회장은 1995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앞으로 전문 경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노력하겠다”고 밝혔지만, 20년이 지난 현재까지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신 총괄회장은 누리집에서 “‘2018년 아시아 톱 10 글로벌 그룹’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수립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핵심 역량을 강화하여 해외 무대로 끊임없이 진출하고 있다”고 내세웠다. 하지만 실제 경영 행태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동떨어져 있어, 상법 개정 등 제도적 견인 없이는 변화가 어려움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상장회사와 관련한 상법상 특례법(제548조의 8)은 2조원 자산 규모의 회사는 사외이사를 3명 이상 두고, 사외이사가 이사 총수의 과반수가 되도록 함으로써 회사 경영을 독립적으로 감시하라는 취지를 담았다. 하지만 롯데나 한화에서 드러난 사외이사 면면과 이사회 운용 행태는 현행법이 총수 일가의 전횡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란 걸 보여준다.

낙후된 이사회 기능은 국가경쟁력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난해 9월 나온 세계경제포럼(WEF)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144개국 가운데 25위였다. 하지만 이사회가 경영진을 감독하는 기능을 효과적으로 하는가의 항목에서는 130위로 2년 전 121위에서 뒷걸음질하면서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이에 장하성 고려대 교수(경영)는 저서 <한국 자본주의>에서 “이사회의 기능과 소액주주의 보호는 기업 지배구조의 핵심적인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개선하지 않기 때문에 규제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짚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이사회와 감사 기능 강화를 위한 움직임은 전혀 진척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독립적 사외이사와 감사 선임을 지원할 집중투표제 의무화나 감사위원 분리선출 등을 약속했다. 하지만 집권 이후 정책은 경제민주화 대신에 규제 완화로 표변했다. 2013년 법무부가 후보 시절 공약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을 만들려고 했지만 박 대통령의 노선 변화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박 대통령은 오히려 같은 해 8월에 신동빈 롯데 회장 등 10대 그룹 총수와 만나서, 상법 개정안에 대해 “경제에 찬물 끼얹는 입법이 되면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고 후퇴하는 발언을 했다.

이후 2년 만에 롯데 총수 일가의 경영권 분쟁이 불거지면서 재벌 지배구조 개혁에 대한 필요성과 함께 묻혀버린 상법 개정안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에 새누리당은 신규 순환출자를 금지한 것에 더해 기존 순환출자 해소도 검토한다고 하거나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도록 하는 방안을 고려하겠다는 등 ‘강력한 재벌 개혁 수단’을 언급했으나, 곧바로 말을 뒤집어 ‘립서비스’에 그쳤다. 최근 <블룸버그> 통신의 윌리엄 페섹 칼럼니스트는 “롯데의 대실패(fiasco)는 경제민주화를 추진할 완벽한 기회를 제공했지만 최근 대기업에 일자리 창출 등을 호소하면서 이 기회는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시민단체는 최근 여당의 ‘립서비스’ 정책 대신에 박 대통령의 공약만 실행되어도 문제 해결에 큰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공약대로 상법 개정이 이뤄진다면 사외이사를 포함한 이사회가 제구실을 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의 서재교 사회적경제센터 시에스아르(CSR) 팀장은 “외환위기 이후 1998년에는 사외이사를 의무적으로 두도록 하는 기업이 자산 1조원 규모 이상이었는데 2000년에 자산 규모 2조원으로 바뀌었다”며 “이를 되돌려 더 많은 기업이 사외이사를 둘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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