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뛴다/⑥ 박성만 삼영시스템 러 법인 부장
‘에따 러시아’
‘여기는 러시아다’라는 뜻으로, ‘로마에 왔으면 로마 법을 따르라’는 말이다.
한반도의 80배 넓이에 양 극단의 시차만 11시간에 이르는 러시아를 헤집고 다니는 박성만(48) 부장에게 이 말은 충고이자 극복 대상이다. 박 부장은 연간 2억5천만개의 도시락을 생산하는 ‘코야’의 마케팅 책임자이다. 코야는 한국야쿠르트의 관계사인 삼영시스템이 2004년 러시아에 세운 현지 법인이다.
한국야쿠르트에서 컵라면 제품의 하나로 나왔던 사각형 용기의 ‘도시락’ 라면이 1990년 한-소 수교 이후 러시아 보따리상의 손에 들려간 지 15년여가 흘렀다. 도시락 라면은 태생지인 한국땅에선 인기가 시들었지만,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CIS)에서는 연간 2억5200만개가 팔린다. 모스크바의 외곽도시 라멘스코예에 지난해 9월 들어선 1만3천여평 공장에서 24시간 4교대로 생산되는 물량이 고스란히 소진된다. 러시아 국민 1억4천여만명이 1년에 평균 두 개씩은 먹는다는 얘기다.
박 부장은 2002년 10월 러시아에 처음 발을 디뎠다. 97년 블라디보스톡 주재소가 생기고, 2000년 모스크바 주재소가 들어선 데 이어, 본격적인 현지 마케팅을 위한 공격수로 급파된 것이다. 러시아의 ‘도시락’ 역사를 보따리상 시대, 현지 마케팅 시대, 현지 생산시대 나누는데, 그는 2기와 3기의 주역으로 뛰고 있다.
“모스크바는 세계적인 대도시지만, 러시아를 누비다 보면 오지에 떨어진 느낌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는 3년여 동안 89곳의 연방행정지구 가운데 80여곳을 출장다니며, 중간 도매상인 딜러들을 관리했다. 술도 잘 못하지만 이곳에서 마케팅을 하려면 이른바 ‘보드카 드루크(보드카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러시아에선 담보를 잡는다든지 금융회사를 통해 채권위험을 관리할 방도가 없다. 사람을 믿고 일단 물건을 넘겨야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 관리의 필요성은 커진다. “비행기를 타고가서도 열 몇시간씩 자동차를 달려야 하는 곳들에 수백만 달러어치를 깔아놨다고 생각하면 자다가도 식은땀이 솟습니다.” 러시아 사업의 네트워크 구축까지 간담이 서늘한 고비들을 숱하게 넘었다는 설명이다.
광활한 땅에서는 가격을 관리하기도 쉽지 않다. 하루 생활권인 한국에서야 서울과 부산의 라면 가격이 다를 이유가 없다.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에서는 모스크바 인근 공장서 출발한 라면 화물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한달씩 움직이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도시락은 러시아에서 15루블(약 500원) 안팎의 균일한 판매가격을 유지해, 가격관리에 성공한 드문 사례로 손꼽힌다. 모스크바의 대형할인점 아샨에서 마주친 러시아 건설업자 발로쟈 블라지미로비치는 “도시락 라면 3박스를 샀다”면서 “가격도 무난하고 가족들이 하루 3개 정도씩 먹기 때문에 할인점에서 주기적으로 박스 구입을 한다”고 말했다.
코야는 현재 2억7천만개의 도시락 생산시설과 8천만개의 봉지라면 ‘퀴스티’ 생산시설을 갖추고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 국가들외에도 동유럽 시장까지 넘보고 있다. 베트남 자본의 라면 회사들이 ‘도시락 타도’를 내걸고 무서운 추격을 하고 있지만, 성숙기에 들어선 러시아 시장을 지키는 한편 그 너머의 시장을 공략한다는 전략이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은 물론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오지에서도 한글이 선명한 도시락이 팔리고 있습니다. 이젠 우크라이나·벨라루시 등을 거점으로 폴란드 등 동유럽으로 넘어갈 겁니다.”
글·사진 모스크바/정세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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