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00억원 규모였던 국내 수제맥주 시장은 2021년 1520억으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제주맥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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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한번이라도 맛 본 수제맥주가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보자. 국내 수제맥주 시장은 누적판매량 2500만캔을 기록한 메가히트작 ‘곰표밀맥주’를 포함해 최근 2년(2020~2021년) 새 100여종이 새롭게 출시될 정도로 뜨거워졌다. 올해도 자체 브랜드는 물론 증권·치약·아이스크림 등과 협업한 각종 컬래버레이션 맥주가 쏟아지는 등 그 기세가 여전하다. 정말 ‘수제맥주 전성시대’가 열린 것일까?
5일 한국수제맥주협회 자료를 보면, 국내 수제맥주 시장은 양적으로는 계속 성장세에 있다. 2014년 주세법이 개정돼 소규모 양조장 맥주의 외부 유통이 허용된 이후, 54개(2014년)에 불과했던 수제맥주 업체는 지난해 163개로 늘었다. 같은 기간 164억원에 그쳤던 국내 수제맥주 매출액은 1520억으로 10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런 급격한 성장세의 배경에는 코로나19 대유행과 주세법 개정이라는 두 가지 큰 전환점이 존재한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홈술족’이 크게 늘어나면서 ‘곰표밀맥주’로 대표되는 편의점 수제맥주 열풍이 불어닥졌다. 또한 주세법 개정으로 맥주 출고가의 72%를 주세로 부과하던 게 2020년 리터(ℓ)당 834.4원(병·캔 맥주) 종량제로 전환되면서 수제맥주 업체의 세금 부담이 줄었다. 이어 지난해에는 소규모 양조장이 대형 공장에 수제맥주를 위탁생산(OEM)하는 것도 허용됐다. 업계 관계자는 “롯데칠성이 수제맥주 위탁생산 확대를 위해 충주 제1공장을 ‘수제맥주 클러스터’로 전환해 제주맥주·세븐브로이 등의 오이엠 생산을 확대하면서 소규모 수제맥주 업체들의 신제품 생산이 훨씬 수월해졌다”고 짚었다. 지난해 롯데칠성의 국내 맥주 매출액은 936억원인데, 이 가운데 오이엠 매출이 300억원을 차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양적 성장이 과연 질적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해당 업계조차 물음표를 찍는다. 커진 시장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업체는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어서다. 수제맥주 업계 1위 업체 제주맥주는 2017년 시장에 진출한 이후 지난해 연 매출액이 288억원까지 성장했지만, 사업 첫해 50억원 수준이던 영업적자는 2018년 64억원, 2019년 95억원, 2020년 43억원, 2021년 72억원으로 이어지며 누적손실이 324억원으로 불어났다.
더 큰 문제는 ‘수제맥주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한 수제맥주’가 양산되는 현실이다. 업계에 따르면, 수제맥주 신제품 수는 2019년 16개 정도에 그쳤지만, 2020년 41개, 2021년에는 64개로 계속 늘고 있다. 제주맥주 관계자는 “본래 수제맥주는 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들어지는 ‘크래프트 비어’를 그대로 번역한 용어로, 대기업에서 생산하는 공장형 맥주에선 찾아볼 수 없는 창의적인 맛과 장인정신을 그 핵심으로 한다”며 “하지만 예전 ‘하우스 맥주’로 불렸던 그 시절처럼, 소규모 양조장만의 특색을 가진 수제맥주가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4캔에 만원짜리 편의점용 수제맥주를 만들려면 단가를 낮춰야 하는데, 과연 수제맥주 특유의 맛을 내는 맥아나 홉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있겠느냐”며 “맥주 제조 면허를 가진 163개 업체 가운데 편의점이나 마트 등에 납품할 수 있는 초도물량 20만개를 맞출 시설이나 자본을 갖춘 곳은 10여개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독창성’을 운운하는 것은 사실상 비현실적”이라고 토로했다.
증권·휘발유·치약·아이스크림 등의 브랜드와 협업하는 ‘근본 없는 콜라보’로 인해 수제맥주의 브랜드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수제맥주 가운데는 콜라보 제품이 많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억에 남는 제품이 없어 ‘브랜드화’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메가히트작인 곰표밀맥주만 해도 소비자는 ‘곰표’만 기억할 뿐, 세븐브로이의 제품이라는 점은 거의 알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출시 후 얼마 안 돼 ‘단종’되는 경우도 많다. 편의점 씨유(CU)의 집계를 보면, 2020~2022년 5월까지 씨유를 통해 출시된 수제맥주는 모두 26종인데, 이 가운데 12종은 이미 단종된 상태다.
2019년 800억 규모였던 수제맥주 시장은 2021년 1520억으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제주맥주 제공
이 때문에 최근 제주맥주가 라거 시장 진출을 선언한 것을 두고 ‘사실상 수제맥주는 끝물 아니냐’는 평가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수제맥주=에일맥주’라는 공식에 갇혀있는 국내 수제맥주 시장에서 라거 시장 진출이 곧 대기업형 공장식 맥주인 테라나 카스에 도전하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제주맥주 관계자는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겠다는 뜻일 뿐, 수제맥주 시장은 끝물이 아니라 이제 시작일 뿐”이라며 “미국의 경우, 전체 맥주 시장에서 수제맥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30%에 이르지만, 한국은 5%도 되지 않아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강조했다. 2016년 국내 전체 맥주 시장에서 0.69%의 비중을 차지했던 수제맥주는 2019년 2.17%, 2021년엔 4.92%로 점유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프리미엄 맥주’라는 수제맥주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형 브루어리의 다양성을 지킬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한국수제맥주협회 관계자는 “대기업이 수제맥주 시장에 뛰어들면서 시장은 커졌지만 독창성은 사라져 가고 있다. 콜라보 제품은 맛의 다양성보다 디자인과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일종의 ‘굿즈’에 머물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며 “소형 브루어리의 온라인 판매를 허용한다거나 물가연동제인 주세 부과 방식을 바꿔주는 등의 현실적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