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군 병사들이 지난달 8일 도네츠크 전선에서 러시아군 진영을 향해 박격포를 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한국 정부가 겉으론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이 미국을 통해 ‘우회 지원’한 포탄 규모가 유럽 전체의 지원 물량을 합친 것보다 많다는 미국 언론 보도가 나왔다.
워싱턴포스트는 4일(현지시각) 지난해 2월 말 이후 1년10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점검하는 특집 기사에서 어떤 방식이었든 “한국은 궁극적으로 모든 유럽 국가들을 합친 것보다 많은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공급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우크라이나군이 필요로 하는 무기와 탄약을 제때 공급하는 일이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지난 2월3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주재로 열린 대응 회의에서 떠오른 문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꼭 필요한 155㎜ 포탄이었다.
백악관은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군사적 목적을 이루려면 월 9만발 이상의 포탄이 필요하다고 계산했지만, 미국이 증산을 해도 필요량의 10분의 1 정도만 공급할 수 있었다. 미군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155㎜ 포탄을 추가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은 이 물량은 국제적 금지 대상으로 포탄 하나에 작은 폭탄 수십 개가 들어간 집속탄이라 공급에 반대했다.
결국, 설리번 보좌관은 미국이 제공한 포탄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한국에 도움을 구하는 계획을 짰다. 미국 국방부의 계산에 따르면 한국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들이 보유한 155㎜ 포탄 33만발을 41일 안에 우크라이나에 공급할 수 있었다. 다만, 한국에는 전쟁 지역에 살상무기 공급을 제한하는 법률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 미국 고위 관리들은 우크라이나에 직접 한국이 포탄을 공급하지 않은 ‘간접적 방식’이라면 미국의 제안을 수용할 의사는 의사를 밝히는 한국 정부와 구체적 방안을 논의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런 과정을 거쳐 “올해 초부터 포탄 공급이 시작됐으며, 결과적으로 한국은 모든 유럽 국가들을 더한 것보다 많은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고 전했다. 다만, 이 신문은 한국이 보낸 포탄이 우크라이나에 직접 제공됐는지, 미국을 거쳐 갔는지, 미국이 자국 보유분을 우크라이나에 보내고 한국이 제공한 것으로 재고를 채웠는지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내용은 지난 4월에 미국 메사추세츠주 방위군 공군 소속의 잭 테세이라(21) 일병을 통해 유출된 미국 국방부 ‘감청 문건’을 통해 어느 정도 공개된 바 있다. 당시 문건을 보면, 김성한 당시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 등은 2월 말께 포탄 33만발을 폴란드를 통해 우회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김 전 실장은 “우크라이나에 탄약을 빨리 공급하는 게 미국의 궁극적 목표”라며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에 포탄을 판매하는 안을 제시했다. 이 직후 국내 언론들도 한국이 미국에 최대 50만발의 포탄을 대여해주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월스트리트저널이 5월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갈 포탄 수십만 발을 이송 중이며, 이는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한국 정부의 정책이 변한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지금껏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미국에 포탄을 수출하더라도 최종 사용자는 미국이라는 조건을 달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은 5월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우크라이나에 직접 지원하는 것은 없다. 폴란드를 통해 우회 지원하는 것도 사실은 없다”고 밝혔다. 다만 앞으로는 포탄을 지원하겠냐는 질의에 “전황을 보고 다른 상황을 고려해서 추후 검토를 할 예정”이라고만 말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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