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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아시아·태평양

라자팍사 가문은 어떻게 스리랑카를 ‘디폴트’에 빠트렸나

등록 2022-05-24 10:59수정 2022-05-24 11:22

마힌다 2005년 집권부터 이어진 족벌정치
2019년 고타바야 당선으로 더욱 강화돼
외채에 의존한 투자 및 부패 의혹에
코로나 팬데믹 등 외부 요인 겹쳐 디폴트 몰려
20일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시민들이 연료 부족 때문에 가정용 프로판가스를 사려고 줄을 서 있고 질서 유지를 위해 군이 투입돼 있다. EPA 연합뉴스
20일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시민들이 연료 부족 때문에 가정용 프로판가스를 사려고 줄을 서 있고 질서 유지를 위해 군이 투입돼 있다. EPA 연합뉴스

지난 10일 아침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 자리한 총리관저에 검은색 헬리콥터 한 대가 착륙하는 모습이 스리랑카 현지 언론의 카메라에 잡혔다. 헬리콥터는 마힌다 라자팍사 전 총리와 가족들을 태우고 북동쪽으로 270㎞ 떨어진 항구도시 트링코말리의 해군기지로 날아갔다. 현재 스리랑카를 뒤흔드는 경제난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는 마힌다 전 총리는 전날인 9일에도 수천 명의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하며 기염을 토했고, 이들은 반정부 시위대를 공격해 대규모 폭력사태로 이어졌다.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여론 동향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그날 저녁 사퇴를 발표했다. 분노를 참지 못한 반정부 시위대는 그날 밤 관저에 난입해 격렬히 항의했다. 결국 군이 나서 이튿날 마힌다 전 총리를 군기지로 빼돌려야 했다.

반정부 시위대는 9일 라자팍사 가문의 기반인 남부 함반토타에 있는 가문 소유 집에도 불을 질렀다. 인근에 있는 ‘돈 알윈 라자팍사 박물관’도 습격했다. 그의 아버지 돈 알윈과 어머니 단디나를 기념하는 이 박물관은 국가재정을 들여 2014년 개관했다. 성난 시위대는 두 인물을 본떠 만들어진 밀랍인형을 훼손했다. 마힌다는 아들과 함께 해군기지로 도망친 지 일주일이 지난 18일 콜롬보 국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건재를 과시했다.

하지만 라자팍사 가문에 대한 스리랑카인들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1948년 독립 이후 최악이라는 최근 경제위기의 책임이 상당 부분 라자팍사 가문의 족벌정치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스리랑카 경제위기의 씨앗은 라자팍사 가문이 화려한 성과를 내고 있을 때 뿌려졌다는 시각이 많다. 라자팍사 가문은 2004년 마힌다가 총리가 되면서 스리랑카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가문이 됐다. 이듬해인 2005년 대통령에 당선됐고 자신은 국방부 장관을 겸하고 동생인 퇴역 군인 고타바야를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동생과 함께 스리랑카 북부를 사실상 통치하고 있던 타밀족 반군 ‘타밀일람해방호랑이’(LTTE)와 전면전에 나서 2009년 내전을 끝냈다. 내전 마지막 몇달 사이에만 타밀족 민간인 4만여명이 목숨을 잃을 만큼 참혹한 전투가 이어졌다. 유엔은 타밀일람해방호랑이와 스리랑카 정부군 모두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의 랜드마크 ‘로터스 타워’의 모습. 신화 연합뉴스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의 랜드마크 ‘로터스 타워’의 모습. 신화 연합뉴스

26년에 걸친 긴 내전을 승리로 이끈 마힌다는 스리랑카 인구의 75%를 차지하는 주류 불교도 싱할라족의 영웅이 됐다. 마힌다는 내전 종료를 계기로 2010년 재선에 성공한 뒤 항만시설과 공항 등 각종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집중 투자에 나섰다. 2019년 완공돼 콜롬보의 랜드마크가 된 방송·관광용 탑 ‘로터스 타워’가 대표적이다. 이 건물은 2012년 중국 수출입은행에서 빌린 돈 등으로 착공된 스리랑카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높이 350m)이다. 이런 대규모 투자 덕에 2012년 한때 스리랑카의 경제성장률은 9.2%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이 시기 대규모 투자는 국제 금융시장 등에서 조달한 외채에 기대고 있었고 사업도 경제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의 차관을 받아 라자팍사 가문의 기반인 함반토타에 2010년 건설한 신항구가 대표적이다. 함반토타 항만은 사업 부진으로 빚더미에 빠졌고, 결국 2017년 항만 운영권을 99년간 중국에 넘겨주고 만다. 외신들은 이 사업을 중국이 열성적으로 추진했던 대규모 인프라 건설 사업인 ‘일대일로’가 개발도상국에 ‘채무의 덫’을 불러온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함반토타에서 15㎞ 정도 떨어진 마탈라 지역에 2013년 건설한 ‘마탈라 라자팍사 국제공항’도 한때 하루 이용객이 1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아 미국 <포브스>가 “세계에서 가장 텅 빈 공항”으로 선정할 정도였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마힌다는 헌법을 개정해 3연임 제한을 없애고 2015년 대선에 다시 나섰지만 족벌정치와 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로 낙선했다. 중앙 정치에서 점차 밀려나는 듯 보였던 라자팍사 가문은 2019년 4월 콜롬보를 포함해 전국 8곳에서 벌어진 부활절 연쇄폭탄테러를 계기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260명 이상이 희생된 이 테러로 치안 불안 우려가 커지자, 라자팍사 가문은 타밀 반군과 내전 승리로 자신들이 쌓아 올린 명성을 적극 활용했다. 다만, 이미 재선까지 했던 마힌다 대신 타밀 반군과 내전에 참여했던 동생 고타바야가 나섰다. 고타바야가 2019년 11월 대통령에 당선 뒤 라자팍사 가문의 족벌정치는 더욱 노골적이 됐다. 형제 중 마힌다는 총리, 차말은 관개·수자원 장관, 바실은 재무장관 등 4명이 각료가 됐다. 마힌다의 아들 나말도 청년·스포츠부 장관에 올랐다.

고타바야가 대통령이 된 뒤 시행한 몇 가지 정책도 경제적 실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2019년 말 부가가치세율을 15%에서 8%로 낮추는 등 급격한 감세정책을 펼쳤다. 지난해 4월에는 유기농 육성을 명분으로 내세워 화학비료 수입을 금지했다. 외환보유액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을 덜 목적도 겸해 이런 정책을 추진했지만, 갑작스레 화학비료 수입이 금지되며 농작물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했다. 그에 따라 식량 가격이 폭등하게 된다. 결국 스리랑카 정부는 지난해 가을 화학비료 수입 금지 정책을 철회했다.

2020년 봄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라는 외부 충격은 내부적으로 이미 취약해진 스리랑카 경제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스리랑카 경제를 지탱해온 것은 2018년 기준 230만명에 이르는 외국인 관광객과, 150만명이나 되는 이들이 외국에 나가 일해서 보내온 송금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사람의 왕래가 끊기면서 관광 수입과 송금액이 격감했다. 여기에 2월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유가 급등과 세계적 인플레이션까지 겹치자 스리랑카 경제는 버티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렸다. 2015년 1월부터 2019년 11월까지 대통령을 지낸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는 “스리랑카가 완전히 파괴됐다”며 “스리랑카가 족벌정치에서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전했다.

19일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경찰이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최루탄을 쏘고 있다. AFP 연합뉴스
19일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경찰이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최루탄을 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스리랑카는 19일 국채 이자 7800만 달러(약 1000억원)에 대한 30일 지급유예 기간이 만료된 뒤에도 이자를 내지 못해 공식적으로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졌다. 아시아에서 디폴트는 1999년 파키스탄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스리랑카는 21세기 들어 처음으로 디폴트에 빠진 아시아 국가가 됐다. 스리랑카의 외환보유액은 지난달 기준 18억1700만 달러에 불과하다. 그나마 중국과 통화스와프를 맺어 마련한 돈이다. 용도가 제한된 15억 달러 등을 제외하면 가용 외화는 별로 없는 상황이다. 알리 사브리 스리랑카 재무장관은 지난 4일 의회에서 “사용 가능한 외환보유액이 5000만 달러(약 640억원)가 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스리랑카 정부는 발전소를 돌릴 석유를 구입할 외화마저 부족해 하루 3시간여씩 정전을 하고 있고, 필수 의약품도 제대로 수입하지 못해 의사들까지 시위에 나섰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마힌다뿐만 아니라 동생인 고타바야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고타바야는 퇴진을 거부하며 버티는 중이다.

라자팍사 가문을 둘러싸고는 부패 의혹도 끊이지 않는다. 유명 인사들의 금융거래 내역 등을 분석한 지난해 10월 ‘판도라 페이퍼스'에 따르면 마힌다의 조카 니루파마가 영국 런던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고급주택을 구입하기 위해 페이퍼컴퍼니를 이용했다고 한다. 비정부기구(NGO) 국제투명성기구 스리랑카지부 상키타 구나라트네 사무차장은 22일치 <워싱턴 포스트>에 라자팍사 형제 중 전략가로 꼽히는 바실이 인도양의 쓰나미 구호물자를 유용하고 공적자금으로 토지를 구입했다는 각종 의혹을 받았지만 제대로 조사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라자팍사 가문의 부패 의혹은 여러 사람에게 (부패의) 그늘을 제공하는 커다란 나무와 같다”고 꼬집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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