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 모스크바에서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모스크바/로이터 연합뉴스
“우크라이나는 꼭두각시 정권이 들어선 미국의 식민지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만든 것이다.”
2014년 봄 이후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생겨난 두 친러 ‘국가’인 ‘도네츠크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한다는 내용의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21일 저녁 연설은 무려 55분간 이어졌다. 러시아 국기가 놓인 크레믈(러시아 대통령궁) 집무실에 앉아 시종일관 굳은 얼굴로 자신이 취한 조처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모습이었다.
이날 연설에 귀 기울여 보면, 전세계를 뒤흔드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인식을 ‘날것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 이후 우크라이나에 대해 러시아가 벌이는 일들을 정당화하는 말로 운을 뗐다. “오늘 연설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그것이 러시아에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다룰 것이다. 이 문제는 너무 중요하기에 심도 깊게 논의되어야 한다. 돈바스 지역의 상황이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단계에 접어들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뿐 아니라 내려진 결정들과 다음 움직임들에 대해서 직접 전하려 한다.”
푸틴 대통령은 이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긴 역사를 언급하며, 우크라이나가 사실상 ‘러시아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는 우리에게 단순한 이웃 국가가 아님을 강조하려 한다. 이는 우리 역사, 문화, 종교 공간의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크라이나는 우리의 동무이며, 단순한 동료·친구가 아니라 혈연과 가족관계로 묶인 친척이다.” 다음엔 현대사로 시선을 돌려 “우크라이나가 진정한 의미의 독립국이었던 전통이 없다. 현대 우크라이나는 완전히 러시아,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볼셰비키가 만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15개 공화국으로 이뤄졌던 소련 시절에 현재 우크라이나의 꼴이 갖춰져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지금에 이르렀다고 주장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7월 크레믈 누리집에 올린 장문의 글에서도 1천년 전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동질성을 주장했는데, 이 연설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나아가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문제에 대한 미국 등 서구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대해 냉소를 보였다. “몇몇 유럽 국가에서 신호를 받았다. ‘당신들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이는 내일 일어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 파트너들도 그렇게 말했다. 우리 대답은 이렇다. 만약 내일이 아니면, 모레인가. 역사적 관점에서 무슨 차이가 있는가.” 사실상 러시아의 일부인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 아닌 법적 구속력 있는 ‘조약’으로 보장하라고 재차 요구한 셈이다. 또 지금 상황을 방치하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겨냥한) 타격용 발판이 된다. 우리 조상들이 들으면 아마 믿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믿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이 두 나라를 둘러싼 긴 역사적 연원까지 언급해 가며 자신의 조처를 정당화하면서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외교적 해법’ 마련은 더 어렵게 됐다. 냉철한 손익계산에 따라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 ‘안보 문제’를 국가의 핵심 정체성과 이어지는 ‘역사 문제’와 연결하며 배수진을 친 꼴이 됐기 때문이다.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미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월스트리트 저널>에 이날 연설에 대해 “러시아 사람들에게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연설”이라고 평했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연설 다음날인 22일 새벽 2시 연설에서 “우리는 누구도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고 응수했다.
조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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