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정부 대표단이 3일 만나 정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2차 회담을 진행하고 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보좌관 트위터 갈무리
지난달 24일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에 열성적이었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정부 내에서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강하게 요구하는 ‘중립화’ 주장을 받아들여 나토 가입을 단념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힌 것이다.
우크라이나 언론 <우크라인스카 프라우다>는 9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끄는 여당 ‘국민의 종’이 전날 성명을 내어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는 대신 미국·러시아·터키 등이 참여하는 ‘새 안전보장 조약’(new security guarantee agreement)에 서명하는 안을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국민의 종은 성명에서 “동맹(나토)이 우크라이나를 최소한 다음 15년 동안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며 “우리는 (나토 가입보다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에) 현실적인 것에 대해 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대안으로 내놓은 안은 “미국·터키와 주변국들이 러시아와 함께 이 합의의 당사자”가 되는 새 안보 조약이다. 국민의 종은 이를 통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국가성을 인정하고 우크라이나 국민들과 정부를 위협하지 않는 법적인 의무를 지게 된다”고 밝혔다. 나아가 “이 제안이 터무니없이 보일 수도 있지만, 새 조약에선 위반자가 나올 경우 보증인들이 취해야 하는 구체적인 절차를 정해야 한다”며 법적 구속력이 있는 합의를 통해 안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대통령 수석 보좌관도 8일 현지 방송에 출연해 “나토는 우크라이나가 (회원국으로) 가맹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우크라이나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전쟁이 터진 뒤 지난달 28일, 지난 3일, 7일 등 세차례에 걸쳐 러시아와 휴전 협의를 진행했다. 이 회담에서 △즉시 공격 중단 △정전 협정 △포위된 도시에서 시민들이 빠져나올 수 있는 ‘인도적 회랑’ 설치 등을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정전에 대해 매우 가혹한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협상에 우크라이나 대표로 참석했던 포돌랴크 보좌관은 3차 회담이 끝난 직후 자신의 트위터에 “인도적 회랑을 설치하는 문제에 작은 긍정적” 전진이 있었다면서도, 이 전쟁의 근본 원인인 안전 보장 문제에 대해선 “강도 높은 협상이 이어지고 있다’고만 밝혔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인들의 ‘결연한 항전’과 미국·유럽 등의 ‘단합된 제재’로 큰 곤경에 빠져 있다. 하지만, 정작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종전과 관련해 까다로운 ‘전제 조건’을 고수하는 중이다. 푸틴 대통령은 전쟁이 벌어진 지 닷새 만인 지난달 28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한 통화에서 이번 사태가 해결되려면, 안전 면에서 러시아의 적법한 이익이 무조건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며 △크림반도에 대한 러시아 주권 인정 △(우크라이나의) 비군사화 △비나치화 △중립화 등을 열거했다. 이후 러시아가 독립을 인정한 동부 돈바스 지역의 두 ‘자칭 국가’의 독립을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도 추가했다. 이 가운데 비나치화란 젤렌스키 정권의 퇴진과 친러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결사 항전 중인 우크라이나인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 보도를 보면, 3차 회담에서 러시아는 실제로 젤렌스키 대통령의 퇴임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러시아의 전방위 공격에 노출된 우크라이나는 한편으로 “결사 항전”을 외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전쟁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는 난처한 입장에 몰려 있다. 결국, 타협안 모색 과정에서 나토 가입 포기 등의 카드가 중요 변수가 될 수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 역시 8일 미국 <에이비시>(ABC) 방송 인터뷰에서 “나토가 우크라이나를 받아들일 뜻이 없다고 이해한 뒤 이 문제에 대해 냉정해졌다”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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