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의 학살이 이뤄졌던 북부 도시 부차에선 창문이 깨지고 외벽이 부숴지는 등 피해를 입은 건물이 자주 눈에 띈다. 이 건물에는 구두가게 등 상점들이 있었다. 부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우크라이나 전쟁의 최대 격전지인 동부 돈바스에서 러시아군의 ‘우세’가 분명해지면서, 이 전쟁이 승패가 판가름 나는 ‘변곡점’으로 치닫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현재 두 나라가 가장 격렬하게 맞붙고 있는 곳은 지난 5월 말부터 러시아의 집요한 포위 공격이 이어지고 있는 루한스크주의 도시 세베로도네츠크이다. 러시아군은 이 도시의 80% 정도를 장악한 채 시내 남쪽 등에서 맞서고 있는 우크라이나군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 도시의 군정 책임자인 올렉산드르 스트류크는 14일(현지시각) “도시에서 서쪽으로 빠져 나갈 수 있는 다리가 모두 끊어졌다”며 “교전이 조금 잦아들거나 교통 수단이 확보되는 순간마다 주민들의 탈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도시 안에는 1만2천명 정도의 주민이 남아 있지만, 대규모 탈출이 불가능해 적잖은 인명 피해가 우려된다.
<로이터> 통신은 이날 오전 발표된 우크라이나 군의 일일 전황 보고는 불리한 전황을 우려하는 경고로 가득 찼다고 전했다. 이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슬라뱐스크에 대한 공세 전개를 위한 조건을 만들고 있고”, 리만, 얌필, 시베르스크에 공세를 펼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모두 세베로도네츠크의 서쪽 도시들로 이 지역을 잃으면 루한스크주 전체를 러시아에게 내주게 된다. 현재 러시아는 루한스크의 95%, 도네츠크의 50% 등 돈바스 전역의 80~90%를 점령하고 있다.
<시엔엔>(CNN)은 이런 점을 들어 개전 후 110여일을 넘긴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적인 승패를 점칠 수 있는 ‘결정적 국면’에 도달했다고 전했다. 러시아는 전쟁의 1차 국면인 ‘키이우 방어전’ 때와 달리 4월 말 시작된 ‘돈바스 공방전’에선 느리지만 착실한 진공을 해왔다. 키이우 때와 달리 근접전을 피하고, 중장거리에서 무차별적인 포격을 가해 적을 초토화시킨 뒤 한발한발 진공하고 있는 것이다.
<에이피>(AP) 통신은 군사 전문가들을 인용해 러시아가 돈바스 지역을 장악한 뒤엔 남부의 주요 항구도시 오데사와 제2의 도시 하르키우에 대한 공세를 강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시아는 앞서 오데사를 점령한 뒤 이를 몰도바 내의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들의 지역인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연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루스탐 민네카예프 러시아군 중부군관구 부사령관은 지난 4월22일 “이틀 전 시작된 ‘특별 군사작전’ 2단계(돈바스 공방전)에서 러시아군의 과제는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과 남부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남부 통제는 러시아어 사용 주민들이 억압을 당하고 있는 트란스니스트리아로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이라고 말했다. 러시아가 트란스니스트리아로 나아가려면, 마리우폴에서 오데사까지 흑해와 맞닿은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을 모두 제압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우크라이나는 주요 수출품인 밀 등을 수출할 수 있는 항구를 모두 잃은 채 내륙 국가로 쪼그라들게 된다.
우크라이나군이 이에 맞서려면 똑같이 강력한 포격으로 맞서야 하지만, 이를 위한 장거리 무기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그 때문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14일 덴마크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동부 전선의 세베로도네츠크 및 하르키우 지역에서 고통스런 손실을 겪고 있다고 시인하며 무기의 신속한 추가 지원을 재촉했다. 이어, “우크라이나가 충분히 강하지 못하면, 그들은 더 나아갈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현재 포위되어 고립된 세베로도네츠크 외에도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인 하르키우가 다시 위태로워졌음을 인정한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3일에도 “충분한 현대식 대포들만이 우위를 보장할 것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려 달라”고 거듭 지원을 당부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대통령실 수석 보좌관은 구체적으로 1천대의 곡사포, 300문의 다연발로켓시스템, 500대의 탱크, 1천대의 무인기 등 중무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구 쪽에서도 무기 재고가 바닥나고 있어, 자국의 안보 공백을 감수하며 무한정 무기를 공급하긴 힘들어진 상황이다. 미국은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 4기를 제공하겠다고 밝혔지만 아직 전선에 투입되지 않고 있다. 무기가 도착해도 훈련에 적어도 3주가 필요하다. 우크라이나 군은 현재 소련식 무기의 탄환이 바닥난 상태여서, 서구의 무기 체계로 바꿔야 한다. 이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돈이 들고, 훈련에도 시간이 걸린다.
에너지와 식량위기로 인해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며, 지난 석달 간 유지돼 온 서구의 연대에도 피로감이 확인되고 있다. 이탈리아·헝가리는 휴전을 촉구하고 있고, 프랑스·독일은 지원을 다짐하면서도 러시아와의 대화 채널 유지를 강조하고 있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물가 오름세로 곤경에 처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10일 자신이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을 경고했는데 젤렌스키 대통령이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14일치 이탈리아 예수회의 정기 간행물 <라 치빌타 카톨리카>(가톨릭 문화)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러시아를 도발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선과 악이라는 흑백 논리는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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